㈜하림 사육지원팀 이경재 부장(익산시 마동에 위치한 하림지주사옥에서)
㈜하림 사육지원팀 이경재 부장(익산시 마동에 위치한 하림지주사옥에서)

[원불교신문=권원준 기자] ㈜하림 사육지원팀의 이경재(법명 석원·덕진교당) 부장. 그와 그의 부서는 하림의 상생경영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특히 회사와 사육 농가의 소통이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역할을 하며 ‘삼장(三場)통합’ 경영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도록 했다.


그의 일터 하림
여전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림이라는 기업명을 들으면 닭고기를 제일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하림은 1978년 전북 익산 황등에서 양계사업을 시작한 이후 40년 동안 꾸준히 성장하며 대한민국의 명실상부한 축산업 대표가 됐으니 말이다. 

하림은 축산업에서 익힌 상생경영을 발판삼아 다양한 사업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우리나라 가축사육에 관련된 대부분 시장을 이끌고 있으며 NS홈쇼핑 등 55개의 자회사를 두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2021년도 자산 기준 우리나라 재계 순위 31위의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처음 제가 입사했을 때 하림은 작은 회사였지만 농가를 비롯한 협력업체와의 상생경영, 지역사회 공헌 그리고 늘 새로운 시도를 아끼지 않았던 덕분에 지금의 결과를 얻었습니다.” 25년의 세월 속에 하림의 성장을 늘 지켜 봐왔던 그이기에 회사의 소식 모두가 자랑거리이다. “㈜하림은 국내 최초로 축산물 품질인증 시대를 열고 포장육과 너겟 제품 등 육가공 식품을 생산했습니다. 또 무항생제 및 동물복지 브랜드인 ‘자연실록’과 신선함을 극대화한 브랜드인 ‘프레쉬업(Fresh-Up)’ 등 프리미엄 닭고기 시장을 개척했습니다.” 2014년엔 우리나라 전통식품인 삼계탕을 국내 축산물 최초로 미국에 수출했다. 이처럼 하림은 세계 일류 품질과 생산성을 추구하며 2030년 가금 식품 세계 10위를 목표로 꾸준히 달려가고 있다. 


삼장통합의 핵심은 소통
이경재 부장은 원광대학교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하고 1995년 첫 직장으로 하림의 데이터 관련 부서의 전산 담당으로 입사했다. 얼마 후 지금의 부서로 이동하게 됐고 25년 동안 사육 농가를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사육지원팀은 주로 원종계에서 종계(씨닭), 종계에서 육계로 이어지는 사육과정에서 발생하는 수급, 원가, 정산 등을 지원한다. 이곳에서 담당하는 농가만 해도 650여 곳이다. 회사의 이익과 함께 650여 농가의 경제를 책임을 지다 보니 농가와의 소통, 신뢰를 중요시하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하림은 1986년 ㈜하림식품을 설립하며 농장, 공장, 시장을 연결하는 ‘삼장(三場)통합’ 경영을 완성했다. 가축의 사육과 축산물의 생산, 도축, 가공, 유통 기능을 통합해 경영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농가와 회사는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했다. 농가 운영이 잘 될수록 기업은 성장하고 그렇지 못할 때는 반대의 결과를 가져오는 구조이다. 그가 속한 부서는 농가와 회사의 소통 가교역할을 담당하는 삼장통합의 핵심부서이다. 


사육 농가의 희망
함께 일하며 남긴 성과 중 가장 보람됐던 일 하나를 꼽았다. “제게 가장 보람된 일은 2005년 5천만 원이었던 농가 수익을 ‘2010년까지 1억 원 달성 프로젝트’를 통해 실제 1억2천8백만 원을 기록하게 했습니다.” 이뿐만이 아니다. 2013년부터는 농가의 소득이 매년 천만 원씩 오르는 ‘1000의 법칙’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언제나 회사와 농가의 상생방안을 모색했기 때문에 하림과 계약한 농가가 단 한 곳도 도산하지 않으며 회사는 농가의 희망이 됐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일도 있었다. “AI(조류인플루엔자)로 인해 열심히 키운 닭들이 살처분됐을 땐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힘들었습니다. 사육 농가의 손실을 비롯해 그로 인한 수급불균형 및 생계 시세 불안으로 회사의 손익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처럼 사육 농가와 거래를 하다 보면 천재지변을 비롯해 다양한 이유로 계약만큼의 사육성과가 좋지 않아 농가가 회사에 변상해줘야 할 상황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위기도 기회로 삼았다. 그 손실을 농가에 부가시키지 않았다. 단기적 이익을 넘어 더 큰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그 결과 농가는 회사를 신뢰하게 됐고 서로가 상생의 관계를 이어가며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해 냈다. 거시적 소통이 서로를 살려내며 동반 상승의 결과를 받아 들게 했다.


마음공부는 문제해결의 명약
“농가 소득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업무를 하다 보니 많은 민원이 제기됩니다. 특히 사육성적이 좋지 않아 적게 나오는 사육비 때문에 회사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죠. 그때마다 제가 마음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언성이 높아지고 서로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했을 것입니다.” 농가를 직접 상대하기에 부딪힐 일도 많았지만, 평상시 쌓았던 마음공부의 힘이 자연스레 일터로 이어졌다. 

그의 공부표준은 ‘온(전)생(각)취(사)’이다. 경계를 당할 때마다 멈추고 생각하고 취사하는 것이다. “언젠가 교무님께서 법회 설법 때 말씀하신 ‘멈춤운동’이 저에게 많이 와 닿았습니다. 저에게 꼭 필요한 공부였기에 그때부터 ‘멈추고 생각하고 취사하고 반조하는 공부’를 꾸준히 훈련했습니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생활과 일속에서 실현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법문이 있다. 일상수행의 요법 5조인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리자’이다. 삶 곳곳에서 사은으로부터 은혜를 입고 살고 있음을 느낀다는 그, 순간순간 은혜에 감사하고 나아가 보은하는 삶을 살고자 노력하고 있음을 이야기했다. 


3대가 함께하는 신앙
어렸을 때부터 교당을 다니며 익힌 마음공부 덕에 그가 처한 곳곳마다 행복의 터전이 되고 있다. 그는 어렸을 때 오수교당에서 입교했다. 그를 교당으로 인도한 것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장사를 하셨습니다. 교당을 다니시며 장사의 고단함을 모두 이겨내셨죠. 그런 부모님의 모습을 보며 저를 비롯한 자녀 모두가 자연스레 교당을 가까이하게 됐습니다.” 중학교를 전주로 진학하며 전주교당과 인연을 맺고 학생회·청년회 활동을 했다. 원광대학교 입학 후엔 원불교대학생회 활동까지 더하며 신앙의 뿌리를 돈독히 했다. 현재는 덕진교당의 교도 부회장으로, 단장으로, 청운회장으로 교도로서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인터뷰 시간, 이은지 교도가 함께했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끄덕임으로 연신 공감을 표현한다.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 자랑스럽다는 이은지 교도. “저에게 아버지는 존경의 대상이자 인생의 롤모델입니다.” 

인터뷰 중 그가 가장 강조한 것이 상생이다. “상생을 위해선 소통이 전제돼야 하고 소통을 위해선 내 것을 내려놓을 줄도,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마음도 있어야 합니다.”

[2021년 7월 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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