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천 원로교무
김종천 원로교무

[원불교신문=김종천 원로교무] 소제목을 ‘용기’라고 달아 놓았지만, 그것은 일반 사회적 의미의 ‘용기’가 아니다. 보통 용기는 무엇인가를 간절히 하고 싶은, 강도가 크면 클수록 다른 것을 희생하면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속적인 용기는 ‘자기가 선택한 일이 얼마나 하고 싶은가’에 정비례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용기는 용기 안에 있는 용기, 또는 모든 용기를 초월한 용기로, 차원이 다른 용기다. 

“진정한 용기는 저속한 영웅들의 사나운 힘이 아니다. 그것은 덕과 이성이 만들어낸 견고한 결심이다.”(알프레드 화이트헤드) 아니, 견고한 결심조차 아닌 그들의 자연스러움의 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최고의 과제에 도전했다는 생각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정직하게 사는 것과 누구를 용서하는 것에도 용기와 겸손이 필요하다. 겸손은 자아를 낮추고 영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우주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곧 천지의 여덟 가지 운행하는 법칙(천지8도)에 순응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진정한 겸손은 용기를 바탕으로 해서만 가능한 것일까? 자신의 의견을 소리 높여 주장하지 못하는 사람, 도전에 대한 두려움이 큰 사람, 남의 말에 순종하는 사람이 더 겸손해 보이는데 무슨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인가? 그런 겸손은 ‘겸손’이 아니다. 두려움에서 나오는 것은 겸손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정이나 행동에 두려움이 적은 사람이라야만 자신을 낮추고, 포기할 것은 포기할 줄 알고 주장할 것은 주장한다. 어떤 아이디어를 실천에 옮길 때는 용기와 겸손이 동행해야만 한다.

용기를 뜻하는 영어단어 courage의 어근 cor는 라틴어로 ‘심장(heart)’을 뜻한다. 용기는 처음에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이야기한다’라는 뜻으로 사용됐다. 시간이 흐르면서 의미도 바뀌어 현재는 주로 영웅적이고 다른 사람이 못하는 용감한 행동에 대해 이 말을 사용한다.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내면의 힘과 의지가 빠져있다면 용기라 할 수 없다. 깊은 마음속 이야기를 하는 것이야말로 ‘평범한 용기’다. 미국의 신학자요 정치학자며 고전이 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쓴 라인홀드 니부어의 ‘평온을 비는 기도(Serenity Prayer)’에 나오는 용기 말이다. 이 기도문은 머그잔이나 티셔츠에도 새겨지며,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서도 낭송된다. 미국의 금주협회에서 애송되면서 유명해졌기 때문이다. “신이시여/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함을/ 제가 바꿀 수 있는 것들을/ 바꾸는 용기를/ 그리고 그 둘의 차이를 알 수 있는/ 지혜를 제게 허락하소서.”

이 기도문은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모두가 알고 있다. 바꿀 수 없다는 것은 체제나 구조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바뀌고 있다. 그러나 정말 바꿀 수 없는 것은 이미 벌어진 일들이나 내가 한 말과 행동, 또는 선택으로 인해 벌어진 일들이다. 바꿀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은 인간만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 우리도 매일 ‘세우자’ ‘돌리자’하는 것이다. 

진실을 이야기하는데 모두가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나보다 강자, 위계적인 조직에서의 윗사람, 모두가 존경하는 사람 곧 왕에 대한 간언,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비판 조직 내부의 비리 폭로의 경우 용기가 필요하다.

 /중앙남자원로수양원

[2021년 7월 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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