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은 마음의 중심을 잡는 계속적인 연습에 효과적이다.
명상은 마음의 중심을 잡는 계속적인 연습에 효과적이다.

[원불교신문=김일원 교무] 낮은 자존감은 성장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사건을 경험하며 자라나고 다듬어져 왔다. 또 앞으로도 우리는 늘 성공만 하고 살아갈 수 없으며 때론 실패도 때론 좌절도 맛보며, 일명 자존감 도둑들을 곳곳에서 만나게 될 터이다. 그런데 연구들에 의하면, 힘들 때 자책하며 ‘스스로에게 가혹한 사람’보다 ‘자신에게 따뜻할 줄 아는 사람’이 정신적으로 훨씬 건강하다고 알려지고 있다. 이들은 우울, 불안, 나쁜 기억 곱씹기 등이 상대적으로 적으며 쉽게 흔들리지 않는 탄탄한 자존감을 보인다고 보고된다.

자신을 향한 비난이 아니라 따뜻함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음은 긍정적인 자기감정을 증진시켜 주기 때문이다. 이는 (아래에서 이야기하겠지만) 높은 자존감을 지닌 많은 사람들에게서 혹 나타날 수 있는 자만심, 나르시시즘, 자기향상 환상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진정한 자존감이 자리하게 한다. 이에 본 글에서는 우리의 마음근육을 키울 수 있는 건강한 자존감 향상 방안으로 “자기에 대한 자애(慈)와 연민(悲)”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내 안의 따뜻함과 연민의 마음 확장
자기 자신에 대해 사랑과 연민의 마음을 갖지 못하는데 어떻게 사랑과 연민의 마음으로 사람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고 그들과 만나질 수 있을까? 자기 혹은 타인, 이 어느 한쪽만을 향한 사랑과 연민의 마음이라면 결국 가짜와 포장의 마음에 지나지 않는다. ‘내 안의 따뜻함과 연민의 마음이 그득할’ 때 그것은 어느 한쪽만을 향해 나타나지 않고, 자기에게든 타인에게든 숨길 수 없이 발하게 되기 때문이다.


첫째, 자신에게 친절하기
내 안의 따뜻함과 연민의 마음이 아직 그득하지 않다면 더더욱 우리는 나 자신에게로부터 이를 확장해 나아가는 연습이 필요하다. 이를 연습할 수 있는 첫째는 “자신에게 친절하기”이다. 이를테면 실패나 실수를 했을 때, 이상적 기준에 맞추지 못했을 때, ‘나는 왜 이 모양일까’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비난하거나 채찍질하지 않고 친절하게 인내심을 가지고 격려하는 것이다. 더 멋지고 잘난 사람이 되려고 애쓰거나 자신을 좋게 바라보려 애쓰기보다, 우리가 타인의 실수를 너그럽게 바라봐 주고 기다려 주듯이 자신에게도 그렇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어떠한 정도의 사람은 되어야 한다는 것, 바보처럼 보이면 안된다는 것과 같은 ‘자신에 대한 판단’을 내려놓고, 보다 친절하게 자신을 대하는 것이다. 이는 자기비난과 달리, 그 순간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고 인정해 주며 공감을 표함으로써 안전과 안정을 느끼게 하고, 약함과 미성숙함을 받아들이며 성장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한다. 그러나 때때로, 충분히 괜찮지 않은 상황에서도 불구하고 “나는 아무 문제없어”, “나는 절대 상처 받지 않아”, “나는 그런 것에 상관하지 않아”라고 단호히 냉랭하게 내뱉는 사람들이 있다. 차가움의 갑옷으로 자신을 무장하며 그렇게 자존감을 포장한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상처받지 않으려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자기방어 기제의 작동이라, 더욱 고달프고 경직된 인간으로 살아가게 할 뿐이다.

타인으로부터의 칭찬이나 친절은 나의 영향력이 작용하는 범주가 아니기 때문에 내 의지대로 할 수 없지만, 자신에게 친절을 보내는 것은 내 의지로 가능하다는 점에서 더욱 연습해 볼만하다.


둘째, 보편적 인간의 삶 인지하기
내 안의 따뜻함과 연민의 마음은 그냥 개발되지 않는다. 이의 확장을 돕는 방법 둘째는 “보편적 인간의 삶을 인지하기”이다. 어려움과 좌절의 고통들이 내게만 일어나는 불행한 사건이 아니라 삶의 과정 속에서 통과해야 할 인간 경험의 한 부분이라 여기는 태도이다. 고통, 실패, 부족함 등이 인간 삶의 일부분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내게 일어나는 슬픔·혼란·약함 등을 대함에 있어, 나 혼자만이 겪는 어려움이 아니라 타인들도 이와 유사한 고통과 약함, 혼란스러움을 인생 어느 때에든 경험할 수 있고 또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자신을 탓하거나 판단하는 정도를 상당히 감소시켜준다. 자기 자신을 포함해 모든 사람에게 부족한 면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상대의 실수나 잘못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야멸차게 이야기하거나 ‘원래 그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라며 쉽게 내뱉지 않게 된다. 고통과 좌절로 힘들 때, 바로 이때, ‘인생은 누구에게나 어렵기 마련이고 따라서 넘어질 수도 있다’고, ‘인간은 누구나 나름의 한계를 가지고 살아간다’고 내게 되뇌일 필요가 있다.


셋째, 있는 그대로 지켜보기
셋째는 “있는 그대로 지켜보기”의 연습이다. 자신의 고통이나 부정적인 생각·감정에 과잉 동일시하는 사람은 실패 경험의 중요성을 확대하고 자신의 한계나 실패를 곱씹기 쉽다. 이러한 반추는 우리의 초점을 편협하게 하고 지나치게 부정적인 자아개념을 갖도록 만들며, 모든 인간이 고통과 실패를 경험한다는 인식을 무색하게 만든다. 반면, 감정과 생각이 일어나는 그대로를 비판단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자기평가의 왜곡을 덜어주는데, 다만 일상에서 ‘있는 그대로 지켜보기’가 그리 쉬운가? 전술한 첫째, 둘째의 방법도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 챙김이지만, 특히 ‘있는 그대로 지켜보기’의 방법은 실제의 ‘반복된 훈련’이 아니면 하루 아침에 이 태도가 발휘되지 못한다. 마음이 방황할 때 이것을 판단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알아차리고 돌아오고, 알아차리고 돌아오고…’ 하는, 마음을 챙기는 연습, 마음의 중심을 잡는 계속적인 연습이 요구되는데, 하루의 명상 시간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집중적인 시간을 통한 단련은 일상에서의 성찰 노력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어느 새벽에 한 시간 정도 좌선하는 시간을 갖는다 치자. 그런데 이 전의 날에 마음을 제대로 지켜보지 못하고 생각과 감정들에 휩싸여 하루를 보냈다면, 좌선 시간에 번잡한 생각들이 치성할 가능성이 크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좌선하는 시간을 갖고, 일어나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일어나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하는 계속적 단련을 이어간다면, 하루의 나머지 시간들도 ‘있는 그대로를 지켜보는’ 챙김이 훨씬 용이해진다.

이는 계속적으로 순환된다. 전날에 마음 지켜보기를 주의하며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 새벽에 좌선하는 것이라면, 이 때에 분별 망상은 훨씬 덜 들끓을 것이며, 번뇌가 일어나더라도 바로 알아차리고 또 일어나면 바로 알아차리고 하는 반복 작업을 통해 정력의 생산 작업이 한결 수월하게 이뤄질 것이다. 그러나, 치성한 분별 망상들로 심단을 모으기가 힘든 좌선 시간이었다면 그 정도 만큼만의 정력으로 일상의 경계들을 대면할 수밖에 없다. 맑은 마음이 오래 지속적으로 모이고 쌓이는 좌선 시간을 보냈다면 이후의 시간들 또한 마음의 움직임을 살피고 챙기는 일상이 되기 쉬울 것이다.

집중적인 시간을 통한 단련은 일상에서의 성찰 노력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일상에서의 성찰 노력은 정력의 생산을 더욱 향상시킨다. 이 때에, 내 안의 따뜻함과 연민의 마음은 어느새 그득해 있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탄탄한 건강한 자존감으로 마음의 근육을 형성해 나의 면역체계로 기능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김일원 교무
김일원 교무

◆ 김일원 교무
ㆍ원광대학교 마음인문학연구소 교수
ㆍ명상심리전문가, 학습컨설턴트
ㆍ경희대 교육심리박사

[2021년 7월 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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