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혜선 동김해교당 교도
안혜선 동김해교당 교도

[원불교신문=이은전 기자] 저 허공에 밝은 달은 다만 한낱 원체로되/ 일천강에 당하오면 일천낱이 나타나고 
나의 성품 밝은맘도 또한 한낱 원체로되/ 일만경계 당하오면 일만낱이 나타나네

가만히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은 채 ‘심월송’을 읊고 있는 원타원 안혜선(圓陀圓 安惠善·70·동김해교당) 교도를 보고 있으니 무심적적, 적적요요가 바로 이런 것인가 싶다. 동김해교당에서는 올해부터 선진님의 오도송이나 성가 가사를 낭송하는 시낭송 심화반이 운영되고 있는데 그 중에서 안혜선 교도는 열성 회원이다. 6월에 안 교도가 고른 낭송 성가는 심월송이다. 나이가 들면서 기억력이 흐려져 암기에 어려움이 많지만 밤이고 낮이고 시간 날 때마다 3절까지 있는 심월송 전체를 다 외우면서 김기천 선진님의 마음에 푹 젖어 보냈다. 

“문득 돌아보니 수십 년 동안 성가를 불러왔으면서도 아무 생각 없이 너무 당연하게 입으로만  불렀더라구요. 자꾸만 외우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용에 관심이 갔고 이렇게 깊이 있는 말씀이구나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선진님 오도송 낭송이 매우 즐겁고 행복합니다.”

동김해교당에서 교도회장직을 맡아 교당 살림을 돌보고 있는 세월이 어느새 10년이다. 앞에 나서는 것을 몹시 싫어하는 그이지만 이런 저런 형편 상 어쩔 수 없이 회장직을 맡고부터는 늘 빚진 기분이었다. 일요일 법회 때마다 집에서 공양을 준비해 와 따뜻한 밥을 나누며 정성도 쏟았다. 그러나 10여 년 세월이 흐르도록 출석 교도수가 정체돼 그의 마음은 늘 무거웠다. 마치 모두 본인 책임인 것 같았다. 

“다른 걱정은 하나도 없는데 늘 교당이 걱정이었어요. 지난해부터 법회를 토요일로 바꾸는 등 소소한 변화와 함께 교도수가 증가하면서 이제 한 시름 놓았습니다.”

원불교와의 인연을 묻는 질문에 그의 눈이 반짝한다. “원불교 없었으면 지금의 저는 없습니다. 벌써 죽었을 거에요.”

스물다섯에 결혼하고 보니 시댁의 분위기는 그가 살아온 세월 동안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생소한 환경이었다. 20여 년을 나고 자란 정든 곳을 떠나 새로 시작한 결혼 생활은 어린 그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버거웠다. 아이 키우고 살림하고 남편 뒷바라지에 시댁 생활 적응까지 흠 하나 없이 철저하게 다 잘해내야 한다는 압박감은 그의 몸을 괴롭히고 그의 마음을 괴롭혔다. 

그때부터 그를 줄기차게 괴롭혀 온 이런저런 병과의 싸움이 시작됐다. 임파선 수술부터 시작해 복막염, 자궁, 우울증 등 거의 20년을 멀쩡한 곳 하나 없이 온 몸이 아팠다. 누가 뭐라 하는 것도 아니건만 모든 것이 낯설고 힘들었다. 상대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하는 말도 그에게는 날카로운 언어로 와 박혔다. 나중에는 결핵까지 그를 괴롭혀 만신창이가 되니 말문이 닫혀버렸는지 6개월 동안 말을 못했던 적도 있다. 공무원이던 남편이 함양에서 김해로 발령이 나면서 집을 짓는데 말을 못해 필답으로 공사를 했다. 그렇게 너무나 낯선 환경의 결혼 생활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은 적응하는데 20년이 걸렸다. 온 몸으로 받은 스트레스를 어디다 풀 곳도 없어 속으로 속으로 삭히기만 하니 몸이 반란을 일으키던 시절이었다. 

 

신앙의 힘, 
생사의 고비마다 
그를 살려내
새로 태어나니 
법문이 오롯이 들어오고

“그때 원불교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찌 됐을지 몰라요. 몸이 너무 아프니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가 그렇게 고생을 하며 생사를 넘나들던 고비마다에는 원불교가 있었다. 

20대 어린 나이에 단칸방에서 펄쩍펄쩍 뛰는 무당의 굿을 지켜보고 그를 온통 휘감았던 귀신에 대한 공포로 해가 지면 집밖을 못나갈 때, 친정어머니가 교당에 가보라고 권했다. 처음으로 함양교당에 가서 교무님을 만나니 부처님이 바로 이런 분이구나 싶었다. 교무님 처방, 무조건 교당에 와서 앉아 있으라고 했다. 젖먹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매일 교당에 가서 살았다. 교당에 가면 마음도 편안하고 좋았다. 딱 한 달쯤 되니 무서움이 사라졌고 3년 만에 밖에 돌아다닐 수 있게 됐다. 

40대쯤에는 온 몸이 마비가 될 정도로 다 아팠는데 그 와중에 결핵까지 걸려 격리병동에 입원했다. 매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교전만 읽었다. 그러다 번쩍! 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한 번도 돌보지 않았던, 그저 떠밀려 살아져 온 ‘나’가 보였다. 나도 상대도 그 누구도 그를 돌봐준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가 있어야 상대도 있고 경계도 있음을 알았다. ‘번쩍!’하는 울림은 다시는 병원에 오지 않으리라는 결심으로 이어졌다. 그때부터 건강에 좋다는 모든 것을 다 찾았고 그동안 눌러놓기만 했던 그의 마음도 돌보기 시작했다. 

“그 이후는 아픈 적이 없어요. 내가 건강하니 가족들 분위기도 다 좋아지고 이제 근심 걱정은 하나도 없습니다. 완전히 제가 새로 태어났어요. 알고 보니 주변 인연이 저를 괴롭힌 것이 아니라 제가 주변 인연을 괴롭힌 것이더라구요.”

그렇게 새로 태어난 후부터는 저승 가는 보따리, 수염에 불붙은 듯 챙기라는 말씀으로 살았다. 이제 진정으로 새사람이 됐다 싶으니 매일 접하는 법문도 오롯이 다 들어왔다. 지금도 법문을 읽으면 마치 딱 나 한 사람을 두고 하시는 말씀 같다. 

“경계가 치성하다가도 교당에 조용히 앉아 교전을 읽으면 대종사님이 저에게 조곤조곤 말씀하시는 것으로 들립니다. 법문을 들을 때면 다른 생각이 하나도 안 올라오고 사량 없이 오롯이 다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면 다 끝납니다.”

주변에서 그를 본 사람들의 평가, 그가 제일 잘하는 일은 여러 일이 겹쳐 경계가 치성할 때 그 자리에서 바로 놓아버리는 것이다. ‘부처님 마음대로 하소서!’라며 진리에게 다 맡겨버린다. 명쾌하다. 그의 하심은 주변에 윤기를 불러들였다. 이제 그의 진심을 알게 된 시댁 가족들도 그동안 밀린 정을 다 쏟아내느라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다. 세월호 사건으로 사랑하는 딸을 잃은 가까운 인연의 무거운 회한도 그가 교당 천도재로 이끌면서 가슴 밖으로 끌어냈고 자동차 등 교당에 필요한 일들도 아무 걸림 없이 뚝딱 해결해냈다. 속깊은 공부와 대조로 일상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 

“저에게 자신감과 희망을 준 곳이고 새 삶을 찾아준 곳이 바로 이 종교입니다.”

[2021년 8월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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