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학과 훈증법회 시 설법

사람이 만일 참다운 선을 닦고자 할진대 
먼저 마땅히 진공(眞空)으로 체를 삼고 묘유(妙有)로 용을 삼아 
밖으로 천만 경계를 대하되 부동함은 태산과 같이 하고, 
안으로 마음을 지키되 청정함은 허공과 같이 하여 
동하여도 동하는 바가 없고 정하여도 정하는 바가 없이 
그 마음을 작용하라. 
『정전』 수행편 무시선법 중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동정간 정신을 
성성적적(惺惺寂寂) 적적성성 하게 하고 한결 되게 하여
여의자재(如意自在)하게 만드는 산 선법이다.
○ 정력(定力)을 얻을 때까지 마음을 멈추자. 
 (수호<守護> = 검문소 설치)
○ 혜력(慧力)을 얻을 때까지 생각을 궁글리자. 
 (사색<思索> = 탁마(琢磨)한 광석(鑛石)
○ 계력(戒力)을 얻을 때까지 취사하자. 
 (실천 = 부도 안 난 수표)
○ 삼대력을 얻어 나가는데 일분 일각도 간단없이 일심으로 
 공부할 수 있는 바르고 빠른 길이다.                   
 『정전대의』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무시선 무처선은 공부인의 ‘수행 표어’입니다. 교리도에 보면 진공묘유 수행문의 귀결처가 바로 ‘무시선 무처선’입니다. 대산종사께서는 『정전대의』에서 무시선 무처선의 공부길을 참으로 쉽게 밝혀주셨습니다. 물론 한문 투로 말씀하셔서 젊은 세대들에게는 외국어처럼 느껴지겠지만 그 내용은 매우 간명하고 누구라도 실천할 수 있도록 제시해주셨습니다.


원불교의 수행은 ‘일원상 수행’입니다. 일원상을 수행의 표본으로 삼아서 스스로 닦아나가는 것입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이 일원상을 표준 삼아서 수행하는 길을 세 가지로 밝혀주셨습니다. 바로 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취사입니다. 이것이 원불교의 수행길이요, 일원상의 수행입니다. 이 세 가지 공부길을 닦아갈 때 우리는 일원상을 제대로 닮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공부를 하다 보면 이 세 가지 공부길이 복잡하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양, 연구, 취사를 다시 하나로 뭉쳐주신 것이 바로 무시선 무처선입니다. 삼학은 결코 다른 공부가 아니며 한 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시선을 단순히 ‘선(禪)’이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무시(無時), 무처(無處)로 닦는 선’임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시(時)라고 하면 곳(處)을 잃어버리고, 곳이라고 하면 시를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또한 무시선 속에 무처선의 공부가 들어있고, 무처선 속에 무시선의 공부가 들어있습니다. 대종사님께서는 참으로 자상하셔서 무시선 무처선을 함께 밝혀주셨습니다.


무시선은 ‘때 없는 선’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바꿔 말하면 ‘선을 하는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아무 때나 선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아침 좌선 만이 선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어느 시간에도 구애받지 않고 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24시간 선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원불교의 선은 삼학선(三學禪)입니다. 정신수양만이 선이 아니라, 사리연구도 선이고, 작업취사도 선입니다. 그러므로 무시선은 수양선(修養禪), 연구선(硏究禪), 취사선(取捨禪)을 때가 없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시선 무처선’을 말로는 하고 있지만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과거 수도하신 어른들의 행적을 보면 공부의 마지막 단계에서 무시선 무처선의 경지를 체득하셨습니다. 여래의 화신이라 하는 진묵스님 같은 어른도 장날이면 억지로 시장을 돌아다니셨습니다. 하루는 다녀와서 “오늘 장은 참 잘 봤다.” 그럴 때도 있고, “오늘은 장을 잘못 봤다.” 할 때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 어른이 물건을 사 온 적은 없습니다. 과연 진묵스님은 어떤 장을 보고 오신 걸까요? 
대산종사께서는 진묵스님이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고 성성적적(惺惺寂寂), 적적성성(寂寂惺惺)한 자신의 본성을 여의지 않고 여일하였으면, ‘아! 오늘 내가 장을 참 잘 봤다’며 기분이 좋아서 돌아오시고. 마음이 잠시 한쪽에 끌려나가면 바로 찾아 들이시고 ‘오늘 장은 잘못 봤다’며 시끄럽고 험한 시장 바닥에서 부단히 무시선 무처선 공부를 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시선 공부, 보통급부터
그렇다면 대종사께서는 이 무시선 무처선을 어느 급부터 하라 하셨나요? 그렇습니다. ‘보통급’부터 공부하게 하셨습니다. 일이 있을 때나 일이 없을 때나 한결같이 그 마음을 챙겨서 노력하라 하셨습니다. 마음이 나가면 다시 챙기고, 또 나가면 또다시 챙겨서 여래위에서 할 수 있는 공부를 보통급부터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어떤 분들은 ‘단전주선’만을 강조합니다. 이는 대종사님의 선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단전주선은 좌선의 방법입니다. 원불교의 선법은 좌선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시선 무처선 공부의 체를 확실히 잡아야 합니다. ‘때 없는 선’, ‘곳 없는 선’이어야 합니다. 선할 시간이나 장소가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24시간 처처(處處)로 선심이 이어져야 합니다. 


만일 무시선 무처선이 어렵게 느껴지면 ‘무시 마음공부’, ‘무처 마음공부’로 말해도 좋습니다. 선보다는 마음공부가 더 쉽게 다가옵니다. “망념을 끓이고 있는 것이 공부일까요? 아닐까요?” 분명 망념을 끓이고 있는 것은 공부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망념이 왔을 때 “아! 망념이구나” 생각하고 이 망념을 대치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공부입니다.


그렇다면 “이 노력하는 마음은 선일까요?” 많은 분들이 망념과 싸우는 것은 선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흔히 선이라 함은 ‘적적성성 성성적적한, 본심이 유지되는 일심의 상태’라 말합니다. 그것을 선으로 생각한다면 망념과 싸우는 것은 선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선을 마음공부라 생각하면 법력이 훨씬 커집니다. 무시선 무처선을 ‘무시 마음공부’, ‘무처 마음공부’로 바꿔 보면 아주 작은 노력들 하나 하나가 다 마음공부요, 선공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시선 무처선 구경의 경지, 일심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만이 선이 아니라 그러지 않을 때 무시선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 가는 것도 선 공부입니다. 그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침 좌선을 하는 데 아무 노력 없이 일심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선이 안 된다. 선을 못 하겠다.” 그렇게 안 될지언정 좌선을 한 시간의 공은 있는 것입니다. 노력했으면, 공력을 쌓아갔으면 그분은 선을 한 것입니다. 무시선도 처음부터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전』 무시선법의 표준을 가지고 노력하면 처음에는 잘 안되지만 내 마음을 그렇게 길들여 보려고 계속 정진한다면 그분은 무시선 무처선 공부를 하는 분입니다.

 

한결되게 해 여의자재하게 만드는 산 선법
‘여의자재(如意自在)’란 뜻과 같이 자재한다는 뜻입니다. 자재라는 것은 스스로 있다는 것입니다. 남이 시켜서, 남이 시킨 부림을 받아서 있어지는 ‘타재(他在)’가 아니라 내가 있고 싶으면 있고, 가고 싶으면 가고, 이러고 싶으면 이러고, 그러한 것이 자재입니다. 욕심에 부림을 받으면 그것 또한 자재가 아닙니다. 자재는 조금도 다른 데에서 영향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의자재란 자유자재란 말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대산종사께서는 그 앞에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동정간 정신을 성성적적 적적성성하게 하고 한결 되게 하여”라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의 본성 자리를 회복해서 어떤 일, 어떤 경계를 대하든 요동하지 않고 나의 본래심이 주인 되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을 여의자재라고 합니다. 

 

정력, 혜력, 계력을 기르라
무시선은 수양선, 연구선, 취사선 이 세 가지를 합친 것이라 우리의 마음이 여의자재하기 위해서는 정력(定力), 혜력(慧力), 계력(戒力)의 힘을 얻어야 합니다. 
정력은 마음을 멈추는 공부를 많이 해야 얻어집니다. 마음을 멈춘다는 것은 마음이 움직이려고 하는 그 찰나에 마음을 챙겨서 지금 이 마음에 주하는 것입니다. 이는 평소 자기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에 마음이 흐르지 않도록 유무념으로 아예 작정을 해서 멈추는 공부를 실습해 봐야 합니다. 처음에는 스스로에게 약속을 하고 멈추는 훈련을 하기 때문에 원만한 취사와는 다소 거리가 멀 수도 있습니다. 


다음에는 이 멈춤공부를 조금 더 확장해서 ‘마음이 끌리고 안 끌리는데’ 대중을 잡아야 합니다. 아무리 정당한 일을 하더라도 마음이 툭 끌려서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때도 바로 마음을 되찾아서 온전한 자리에 먼저 머무르는 것이 멈추는 공부입니다. 그러므로 멈추는 공부는 그 사람이 하는지 안 하는지 잘 모릅니다. 스스로 1년, 5년, 10년, 20년 그렇게 하다 보면 멈추는 힘이 쌓이게 됩니다. 그러한 분은 옆에서 볼 때 동(動)하지 않는 부동심(不動心)의 힘을 느끼게 됩니다.


대산종사께서는 ‘조동(早動), 경동(輕動), 망동(妄動)’을 말씀하시면서 “때에 맞지 않게 성급히 움직이지 말고, 신중하지 않고 가볍게 움직이지 말며, 거짓과 허식으로 움직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탐진치 욕심에 쉽게 동합니다. 일을 할 때 실수하는 것은 물론 동해서 안 될 자리에서도 동하기 십상입니다. 이 멈추는 공부를 잘해서 정력을 얻게 되고, 그 얻어진 만큼 마음은 본성에 가까워지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혜력입니다. 지혜의 힘을 얻을 때까지 생각을 궁글리는 것입니다. ‘탁마(琢磨)’란 그 말씀입니다. 우리가 혜력을 얻기 위해서는 평소에 생각을 깊이 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특히 경전공부를 할 때 마음에 걸리는 대목이 있으면 계속 되새김하고 궁굴려 보아야 합니다. 의두 연마도 이와 같습니다. 


연구란 연마(硏磨)하고 궁구(窮究)하는 것입니다. 사색을 하며 두루두루 다양한 방면으로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러나 의두가 깊어지면 사색으로는 그 구경에 이를 수 없습니다. 사색만으로는 의두의 본의가 없어지고 깊은 지혜가 발현이 안 됩니다. 궁구란 마음을 집중해서 뚫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의심이 뭉쳐질 때 ‘의단(疑丹)’이 됩니다. 의심을 딱 놓고 관해야 합니다. 그러한 의단이 쌓이고 계속 두드릴수록 자신도 모르게 생각이 깊어지게 됩니다. 어느 경우에는 의심을 걸면 바로 마음에서 해결이 됩니다.


세 번째는 계력으로 실행력을 얻을 때까지 취사하자는 것입니다. 그 실행의 힘을 얻을 때까지 해보고, 또 해보고, 또 해보고, 또 해보고 그렇게 정력과 혜력과 계력의 삼학의 힘이 어울려지면 그것이 바로 선력(禪力)이 되는 것입니다. 일심정력만이 선력이 아니라, 정력과 혜력과 계력의 세 가지 힘이 합해진 것이 소태산 대종사님께서 말씀하시는 선력이요, 무시선의 힘이며, 무시·무처의 삼학인 삼대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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