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중 예비교무 / 원광대 원불교학과
김원중 예비교무 / 원광대 원불교학과

[원불교신문=김원중 예비교무] 내가 원불교학과에 첫 발을 디딘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그때는 무료한 시간이 많았다. 게임도 질렸고 유튜브도 질렸다. 나는 그 시간을 어떻게든 때우고자 원불교대사전까지 뒤적거렸다. 주로 인물 사진이 딸린 글만 골라 읽었다. 법타원 김이현 종사, 용타원 서대인 종사, 향산 안이정 종사 그리고 범산 이공전 종사 등. 원불교의 거목이셨던 분들을 읽었다.

나는 어른들의 사진을 보면서 별난 생각을 했다. ‘구타원님은 젊으셨을 때 미인이셨구나, 용타원님은 백발일때가 훨씬 아름답구나, 범산님은 풍채가 크시네!’ 그렇게 백과사전 속 인물사진을 보면서 교단의 어른들을 알아갔다. 어느 날, 상산종사 사진을 보았다. 몸에 전율이 돋았다. 가느다란 눈매는 부드럽고 깊은 두 눈동자에는 세상의 지혜가 가득 담겨있었을 것 같았다. 성안(聖顔)이라고 느꼈다. 인물 사진을 보고 전율이 돋았던 적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짜릿한 순간으로 나는 상산종사를 처음 알게됐다. 그리고 나는 상산종사의 『평화의 염원』을 읽었다.

대종사께서 서울 돈암동에 계실 때 상산종사는 대종사를 즐겁게 해드리고자 이동백이라는 명창을 모셔 온 적이 있었다. 그때는 무더운 여름이었는데 대종사는 그 판소리에 푹 빠지셔서 더운 줄도 모르시고 앉았다 춤췄다 일어나셨다 하면서 즐기셨다고 했다. 또 대종사는 춘향전 연극을 보시다가 사또가 춘향이를 고문하는 장면을 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을 뵙고는 상산종사는 미안하고 죄송스러움을 느꼈다고 했다. 상산종사가 대종사를 부산에서 총부로 오는 길을 모실 때 였다. 지금처럼 교통이 편리하지 못해 기차로 대전까지 와서 다시 호남선으로 갈아타야 했었나 보다. 대종사는 배웅 나온 여러 교도들을 일일이 반겨주며 기차에 오르셨는데 막상 시봉하셨던 상산종사는 잘못해 다른 차에 올라탔다. 상산종사는 이런 불안한 상황 속에서 열차는 대전에 도착하여 대종사를 다시 뵙게 되었을 때 두터운 죄송함에 몸둘 바를 몰라했다.

『평화의 염원』 속에는 상산종사와 대종사의 추억이 가득 묻어있다. 그래서인지 정사(正史)에서는 배우지 못한 일화들이 많았다. 나는 상산종사를 비롯한 어른들의 일화를 한데 모으고 싶었다. 주옥같이 귀한 일화를 잘 정리해서 두터운 읽을거리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불교의 어우야담을 생각했다.

『평화의 염원』을 통해서 희망사항만 떠올린 것은 아니었다. 내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생각도 했다. 원기35년 6월, 상산종사는 대산종사를 모시고 한국 근현대의 문학 거장이었던 춘원 이광수 선생 댁을 방문했다. 상산종사는 교가에 대한 배경설명을 하고 이광수 선생에게 작사를 의뢰했다. 그분이 작사해준 곡은 성가 18장 「불자야 듣느냐」였다.

상산종사는 유일학림 교가를 이광수 선생에게 부탁한 것은 이광수 선생이 불교에 조예가 깊은 문호일 뿐 아니라 대종사께서 그분이 지은 소설 『이차돈』의 서문(序文)을 들으시고 그 사람은 초견성(初見性)한 사람이라고 크게 찬양하셨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이 대목에서 깜짝 놀랐다. 우리가 ‘경지’라고 부르는 것. 지식과 지혜가 상당히 순숙된 그 단계가 진리라는 큰 맥에서 만남을 느꼈다. 대문호의 경지와 일원교법의 경지가 각각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겹쳐지는 것을 느꼈다.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의 이치를 전공하는 나는 글의 소재를 멀리서 다른 곳에서 찾을 필요가 없었다. 훗날, 진리를 체받아 얻은 현안(賢眼)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 내용을 한 권의 책으로 써야겠음을 결심했다. 당돌한 염원을 해본다. 

/원광대 원불교학과

[2021년 8월 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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