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 정유성 원로교무

유산 정유성 원로교무
유산 정유성 원로교무

[원불교신문=류현진 기자] 원불교 최초 미국 교무로 교사에 기록된 유산 정유성 원로교무(唯山 鄭惟誠·86). 세계학계에 처음으로 원불교를 알리게 된 그의 삶을 조명해 본다.

검사에서 전무출신으로
전남 영광군에서 태어난 정유성 원로교무는 어린 시절부터 공부에 두각을 나타냈다. 일제강점기에 초등학교를 다니며 익힌 일어는 훗날 그가 대학교수를 하며 불교서적 일어판을 읽는 기초가 됐다. 영광고등학교 재학시절에는 독일어 발음이 좋다며 독일어를 전공하면 성공하겠다는 칭찬을 들었다. 그때부터 놓지 않고 독일어를 공부해 그가 박사학위 자격시험을 합격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정 원로교무는 영광고 졸업식 때 우등상, 개근상, 공로상 등 모든 상을 휩쓸 정도로 수재였다. 그는 독학으로 고등고시를 준비해 검사가 되려는 진로를 계획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시험 책을 들고 조그마한 암자로 들어가려고 졸업을 기다리던 참이었다. 하루는 그의 집에 지붕이엉을 하러 왔던 독실한 원불교 교도 정시권 할아버지와 저녁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게 됐다. “할아버지께서 사람의 마음은 원래 맑은 면경 같은 것인데 때가 끼면 안보이다가 깨끗이 닦으면 훤히 보이는 것 같이, 수도하면 우리 마음도 맑아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원불교에 가서 마음공부를 하자고 했어.”

일사천리로 도양교당(당시 원불교도양지부)에 있던 조준곡 교무가 입교원서와 전무출신서원서를 동시에 쓰게 해 중앙총부로 보냈고, 그의 진로는 검사에서 전무출신으로 바뀌게 됐다.


원불교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인물
1955년 원광대학에 수석 입학한 정 원로교무는 원광대학 동쪽에 설립된 원광고등공민학교에서 4년간 영어교사로 일하고 숙식하며, 교학대 공부를 병행했다. 1959년 그는 원광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가 대학교 4학년 때 철학원서강독 수업을 들었는데 영어로 된 철학원서를 읽고 한국어로 해석하는 실력을 담당 교수가 크게 칭찬하며 대학원 진학을 권유했다. 그는 중앙대학교 철학과 대학원에 합격했지만 등록금이 없어 진학하지 못하고, 중앙총부에서 1년간 쉬면서 영어공부에 주력했다. 공사에 적극 참여하지 않고 영어공부만 하고 있으니 주변에서 비난이 들끓었다. 정산종사는 “네놈들이 무얼 아느냐? 그 애가 지금은 그렇게 있으나 언젠가는 원불교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인물이 된다. 잘 가르쳐라”라고 훈계했다.

그 후 정산종사는 마치 30년 후 그가 할 일을 예견이라도 한 듯, 그를 조실로 불러 “우리 교전 번역할 때 ‘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취사’ 삼학과, 천지은, ‘부모은’, ‘동포은’, ‘법률은’ 사은은 번역하지 말고 음역을 하고 밑에다 주를 달아라. 그걸 다 번역해버리면 원불교와 불교의 구별이 서지 않는다”고 미리 당부했다.


미국 첫 교무로 유학길에 올라
그는 1961년 원광여자중학교 영어교사로 임명된다. 뛰어난 실력으로 그의 영어 수업은 인기가 많았다. 그를 눈여겨본 교감이 익산지구 영어교사 연구수업을 그에게 맡겼다. 그는 새로운 영어교수법에 대한 연구수업을 성공적으로 진행했다. 그것이 전라북도 도교육위원회에 보고됐고, 미국 풀브라이트(Fulbright) 장학재단에서 국제중등학교교사 향상 목적으로 선발하는 장학생 시험에 응시하라는 공문을 받는다. 그는 국내에서 총 10명을 선발하는 시험에 최종합격해 미국 샌프란시스코주립대학에서 한 학기 동안 영어학과 영어교수법을 공부하고 영어교사 자격증을 받았다. 훗날 그가 미국영주권을 받는데 자격증이 큰 도움이 됐다.

풀브라이트 프로그램을 마치고 1965년 봄에 귀국해 대산종사에게 인사차 신도안에 방문했다. 미국에서 500달러를 저축해온 그에게 대산종사는 “그 돈을 원광여중 서무주임 이건춘 선생에게 맡겨 키워서 다시 미국유학을 가도록 해라”고 지시한다. 대산종사의 명에 따라 원광여중에서 2년간 복무(풀브라이트 장학규정에 따른 의무)하면서 그는 문교부 미국유학자격시험을 준비해 통과한다. 1967년 그는 구타원 이공주 종사와 부산진교당 박금용 교도에게 유학비 보조금을 받아 미네소타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로 유학을 떠난다. 총부에서는 미국 유학을 떠나는 정 원로교무와 아타원 전팔근 교무를 미국교무로 발령한다.

그는 미네소타대학에서 4학기 공부하며 인도철학개론, 불교철학, 베단타철학을 배운다. 그후 1969년 루즈벨트대학으로 옮겨 논리학, 철학사 등 기초철학과목부터 시작해 3학기를 공부해 철학 석사학위를 받는다. 오하이오주립대학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해 열심히 공부했지만 그는 박사학위후보자격시험에 실패해 학교를 떠나야 했다. 입학생 7명 중 한 명만 시험에 합격하고 6명이 학교를 떠나야 했다. “학기말 논문을 제출하면 빨간 잉크로 다 절단내서 ‘이게 대학원 철학과 논문이냐’며 면박 주기가 일쑤였어. 그 혹독한 철학적사고 훈련이 있었기에 미국대학에서 철학교수가 될 수 있었던 것 같아.”

그를 안타깝게 여겼던 오하이오주립대 학과장의 주선으로 정 원로교무는 뉴멕시코대학 철학과박사과정에 입학한다. 그런데 그해 말쯤 미시간주립대학 대학원에서 그전에 신청했던 입학허가서가 도착했다. “대산종법사님께 어떻게 해야 할지 서신으로 아뢰었는데 ‘너는 앞으로 큰일을 해야 하니 더 좋은 대학으로 가거라’는 편지를 받고 바로 짐을 싸서 미시간주립대학교로 갔지.”

그는 첫 학기에 여느 학생들이 7~8년이 걸려도 합격하기 어려운 박사학위후보자격시험의 한 파트인 ‘형이상학 인식론’을 수월하게 통과해 주변의 이목을 끌게 된다. “오하이오주립대에서 서양철학박사를 받았더라면 원불교와는 멀어졌을지도 모르는데 미시간주립대학교 지도교수가 원불교 교리를 분석체계를 세워 세계학계에 올려 놓아보라고 하셨어. 덕분에 원불교 안에 머물게 됐고, 대학교수직 얻는데 결정적인 보탬이 됐어. 오하이오대학 박사후보시험 실패는 은생어해가 된 셈이야.”

그는 ‘원불교윤리학: 원불교도덕체계의 개념적분석(The Ethics of Won Buddhism: A Conceptual Analysis of the Moral System of Won Buddhism)’이란 박사학위 논문으로 세계학계에 원불교를 처음으로 알리게 된다. 1979년 봄 학위수여식에는 시카고교당에 주석하던 상산 박장식 종사가 참석해 그의 졸업을 축하했다. 졸업 후 그는 플로리다인터내셔널대학 철학종교학과 교수로 임용된다. 

“그 대학에 교수로 뽑힌 것은 순전히 내 능력이 아니고, 앞으로 원불교를 세계학계에 알릴 수 있는 능력을 기르도록 대종사님과 정산종사님의 성령이 굽어살피신 것이라 굳게 믿고 있어.”
 

정산종사께서 친히 말씀해주신 
“덕이 있어야 포용력이 생긴다. 
청렴해야 신망을 얻는다. 
의지가 굳어야 크게 이룬다”는
법문을 평생 가슴에 담고 
살아오고 있어요.

원불교 교전을 전 세계 도서관으로
그간 원불교 교화의 길을 모색할 여유가 없었던 그는, 대학교수가 된 후 원불교를 연구분야로 정하고 원불교 교리에 관한 연구논문들을 써서 국제학술지에 발표하면서 연구실적을 쌓아 갔다.

그는 1999년에 정교수로 승진한다. 그때까지 치열한 준비를 해야 했고 승진조건의 하나는 원불교교전의 학문적 영어번역으로 미국대학 종교철학교재로 쓸 수 있게 출판하는 것이었다. 교단에서도 학계에서 쓸 수 있는 제대로 된 원불교 교전 번역본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동북아세아불교연구 제일 권위자라고 자처하는 쿠로다연구소(Kuroda Institute)에 번역원고를 보내 엄격한 심사 과정을 통과했고 하와이대학 출판사를 통한 출판이 결정됐다. 책 제목은 『The Scriptures of Won Buddhism: A Translation of Wŏnbulgyo Kyojŏn with Introduction』으로 2003년에 출판되어 미국 국회도서관은 물론 전 세계 대학도서관에 다 들어가 원불교를 세계학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그해 10월, 그는 플로리다인터내셔날대학재단으로부터 연구분야 우수상을 받았다. 그 후로 3권의 책이 더 출판됐고 정 원로교무는 여러 편의 문집에 원불교에 관한 챕터를 썼다.


마이애미교당 설립
1999년, 마이애미교당 봉불의 경사가 겹쳤다. 마이애미교당은 선모임으로부터 시작됐다. 대학에서 그에게 선불교 강의를 받았던 학생들이 주말에 선모임을 하자고 먼저 요청한 것이다. 처음 13명이 모여 매 주말에 선모임을 이어갔다. 20분 정도 선을 하고 반야심경, 일원상서원문을 독송하고 설법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는데, 고통스런 삶이 행복한 삶으로 개선되는 등 회원들은 법회의 효과에 만족해했다. 정 원로교무는 1988년에 변호사를 사서 미국정부에 정식으로 원불교마이애미교당을 비영리 종교단체로 등록하고, 회원들을 하나 둘 원불교에 입교시키고  원불교 교법으로 마음공부를 지도해 갔다. 

“1999년에 20만 달러를 주고 대학 근처에 집을 사서 교당으로 개조했어. 명타원 정연석 당시 미국동부교장님의 정성으로 주타원 김묘정 대호법님으로부터 10만 달러를 희사받고 기타 여러 교당들의 도움이 있었지. 또한 인타원 박인선 교무가 한국교당을 돌아다니면서 보조금을 얻어 오면서 법신불, 좌종, 탁자 등을 준비해 왔어. 나를 초대교무로 인타원 박인선 교무를 보좌교무로 발령해 정식교당이 시작됐어.”


미국에 정산종사법어 알려
2000년 정산종사탄생백주년 기념행사에 맞춰 그는 교화용으로 번역한 정산종사법어를 원불교출판사에서 출간한다. “1995년부터 번역을 시작했어. 한국에 다녀가신 큰 성자의 사상을 미국 대학출판사를 통해 세계학계에 알려야겠다는 생각으로 번역원고를 대학교재로 쓸 수 있도록 다시 정리했어.” 그는 정산종사의 종교 철학 사상을 전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장절은 없애고 중요한 장절은 다른 장절로 옮겨 논리적으로 적절하게 편집했다. 80여 절이 제거됐고 『한울안한이치』에서 80여 법문을 번역해 적절한 장절에 삽입했다. 예도편과 공도편은 없애고 도덕함양(Moral Cultivation마음공부)이란 편을 하나 만들어서 적당한 곳에 넣었다. 특히 정산종사가 친히 쓴 ‘일원상에 대하여’, ‘원각가’, 『불교정전』에 정산종사가 쓴 ‘일원상의 진리, 일원상의 신앙, 일원상의 수행’ 절을 모두 번역해 게재했다. 정 원로교무는 2009년에 대학에서 퇴임했고 정산종사법어는 『The Dharma Master Chŏngsan of Won Buddhism(원불교 정산법사)』이란 서명으로 2012년 뉴욕대학출판사 판권으로 출판됐다.


『불교정전』 본의 살려내야
그가 1991년 『원불교교전』 영어번역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계속 지도부에 제안하고 있는 일이 있다. 1962년 『불교정전』이 『원불교정전』으로 넘어오면서 크게 변질된 핵심교리를 대종사와 정산종사가 친히 쓴 원본으로 복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불교정전』은 대종사의 제생의세 경륜을 사대강령 중 정각정행과 지은보은이라는 강령으로 실현한 것이다.

『불교정전』에서는 교의편 첫 장에 사대강령을 밝혀 교리의 방향을 밝혔는데 현 정전에는 교의편 맨 끝 제7장으로 들어가 있다. 또, 정각정행의 구체적인 내용을 정산종사가 ‘일원상의 진리’, ‘일원상의 신앙’, ‘일원상의 수행’ 3절에 밝히면서 ‘반야지(般若智)를 알고, 양성하고, 사용하는 것이 일원의 수행’이라 밝혔는데 현 정전에는 그 반야지라는 표현을 삭제했다. 이는 대종사가 불교에 연을 댄 금강경의 핵심을 없애버린 것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이 밖에도 보은의 대요(응용무념의 도, 무자력자보호의 도, 자리이타의 도, 불의를 제거하고 정의를 세우는 도)를 실천하는 것이 원불교의 불공(보은즉불공)이라 했는데, 그것을 빼고 사요를 그 자리에 넣은 점, ‘병든 가정과 그 치료법’을 ‘병든 사회와 그 치료법’이라 바꾼 것 등을 그는 지적했다.

“이는 원불교를 세우신 두 성자의 경륜을 몹시 흐려버린 무지한 처사야. 머지않아 정전 한글 원본에 대해 왜 두 성자의 근본 뜻을 복원해야 하는가를 밝히려고 해. 물론 나의 제안대로 한국어판 정전을 수정한다 해도 그 수정작업부담이 만만치 않을 거야. 영어판, 독일어판, 불어판, 일어판, 중국어판, 서반어판 등을 정정하는 일은 교단에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지. 그러나 몸에 병의 뿌리가 있으면 아무리 아프더라도 끊어내야 해. 병인지도 모르고 그냥 두면 결국 생명을 잃게 돼.”

[2021년 8월 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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