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권원준 기자] 식사를 위해 찾은 식당에서 옆 테이블 한 아이가 엄마에게 쉼 없이 질문을 한다. 밥을 먹는 삼십여 분 동안 스무 번은 족히 넘는 ‘왜’를 들었다. 아이들은 쉬지 않고 ‘왜’라는 질문 속에서 이해의 폭을 넓히며 성장한다. 아쉬운 점은 많은 사람이 언어를 학습하고 환경을 체득하는 일생의 아주 짧은 시기를 제외하고는 ‘왜’라고 더는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그건 그런 거야’ 하며 이해한 듯 지나간다.

나 자신을 돌아본다. ‘왜’라는 의구심 없이 산 시간이 꽤 긴듯하다. 의두연마, 성리공부 골똘히 생각해 보니 어디 하나 내세울 것 없다. 지금 생각나는 건 학부 시절 스승님들이 ‘까닭 있게 살고 있지’란 질문에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던 기억만 떠오른다. 

근사하게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시작했건 아니면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했건 모든 일에 ‘왜’라는 질문이 있고 없음은 과정과 결과에 대한 상당한 차이를 나타낸다. 단순히 생각해도 ‘왜’라는 질문은 인과의 이치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원인을 찾는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소태산 대종사의 구도도 ‘저 하늘은 얼마나 높고 큰 것이며, 어찌하여 저렇게 깨끗하게 보이는고(『교사』 제2장 소태산 대종사)’라는 의심에서 비롯됐다. 『정전』에서도 ‘의(疑)라 함은 일과 이치에 모르는 것을 발견하여 알고자 함을 이름이니, 만사를 이루려 할 때에 모르는 것을 알아내는 원동력이니라’라고 밝히지 않았는가. 그렇기에 이 법으로 일과 이치를 알아가고자 하는 공부인이라면 어떠한 일을 당할 때 그 누구보다 먼저 ‘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질 필요가 있다.

지난 5월부터 우리 교단은 새전서 개정 증보판의 오류로 큰 파도를 헤쳐나가고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일이 일어났던 원인도 ‘왜’라는 질문이 있고 없음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이를 바로잡기 위한 시작도 ‘왜’라는 질문으로부터였으리라. 교단을 새롭게 이끌어 갈 수위단 선거가 다가온다. 선거까지 길지 않은 일정이지만 교화단, 출가교역자광장 등을 통해 교단을 앞으로 어떻게 이끌어 갈지에 대한 질문이 던져졌다. 이제 우리 구성원들이 나설 차례다. 끊임없는 사유를 통해 정답은 아니더라도 지혜를 모아 해답을 찾을 때까지 질문을 던져보자. 

‘루의 법칙’이 있다. 신체 중 어느 한 기능을 오랫동안 활용하면 발달하고 그렇지 않을 땐 퇴화한다는 이론이다. 평소 ‘왜’라는 질문을 자주 던지며 능동적 사고를 하는 사람과 수동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 간에는 생각의 구조 면에서 차이가 있다고 한다. 가장 큰 차이는 일의 본질을 파악하느냐 못하느냐다. 다시 나를 돌아본다. 습관과 타성에 젖어 주변의 묵계에 흔들려 ‘그렇지 뭐’를 남발하고 살지는 않았는지 말이다. 

[2021년 8월 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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