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도 교무
권정도 교무

[원불교신문=권정도 교무] 『정산종사법어』 권도편 13장에서는 “내 절 부처를 내가 잘 위하여야 남이 위한다는 말이 있나니, 자신에게 갊아 있는 부처를 발견하여 정성 들여 불공하라. 불공에는 자기 불공과 상대 불공이 있는 바, 이 두 가지가 쌍전하여야 하지마는 주종을 말하자면 자기 불공이 근본이 되나니, 각자의 마음공부를 먼저 하는 것은 곧 불공하는 공식을 배우는 것”이라고 했다. 

필자가 출가하기 전부터 인연 맺었던 한 선배가 새겨들으라면서 한 얘기가 있다. “원불교 사람들은 원불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참 잘하는데, 정작 가까이서 원불교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희생을 강요하거나 소홀히 대하는 경향이 있다. 앞으로 원불교가 발전하려면 가까운 인연을 더 소중히 대접하는 문화부터 만들어야 할 것이다.” 듣기에 가슴 아프지만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원불교 사회에서 교무와 부교무의 갈등, 교도와 교무의 갈등, 교도 상호간의 갈등이 점점 심화되다가 분쟁으로 표출되는 사례를 종종 볼 수 있다. 소태산 대종사는 서로가 서로를 부처님으로 모시고 늘 불공하는 삶을 살라고 했는데, 경전 속의 말씀이 우리의 현실에서는 잘 실천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왜 그럴까?

사람이 불공을 잘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알고 그 불성이 자기뿐만 아니라 세상 만물에 깃들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견성’이다. 자신이 본래 부처인 줄을 안 사람이 부처님처럼 살기 위해 정성스럽게 노력하는 삶으로 자기에게 불공하는 것이 ‘양성’이다. 이렇게 불성을 잘 길러 노력하지 않아도 자신의 일상이 부처의 삶을 되고, 또 자연스럽게 모든 존재를 부처로 모시고 사는 것이 바로 ‘솔성’이 된다. 

만약 다른 사람은 잘 위하면서도 정작 자신이나 가까운 사람을 함부로 대하거나, 또는 자신만 위하고 주변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아직 ‘견성’을 못한 것이니, 이런 사람에게 양성과 솔성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래서 원불교 공부에서는 ‘견성’을 중시한다. 견성하는 빠른 방법은 ‘나에 대한 집착’, 곧 ‘아상(我相)’을 내려놓는 것이다. 나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아야 ‘자타의 분별’이 사라지고, 자타의 분별이 없는 그 자리가 바로 부처님 자리이기 때문이다. 정산종사는 자기불공과 상대불공 중에서도 자기불공이 모든 불공의 근본이라고 했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아 본 일이 없는 사람이 사랑하는 방법을 잘 모르듯, 자기불공도 못하는 사람이 상대불공을 잘 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정산종사는 나로부터 내 주변, 사회에서 세계로 나아가는 불공의 순서를 말씀하신 것이다. 

누군가 ‘그대, 지금 공부 잘 하고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자. 쉽게 해답과 공부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영산선학대학교

[2021년 8월 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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