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완 농성교당 교무

정세완 농성교당 교무
정세완 농성교당 교무

[원불교신문=정세완 교무] 얼마 전 유명 연예인 부부가 이혼을 진행한다는 뉴스를 보면서 동창 교무가 나에게 물어 왔습니다. 교무님은 손예진, 송혜교 같은 예쁜 사람과 3개월 살아보고 평생 혼자 살래? 아니면 평범한 사람하고 일생을 살래? 선택한다면 어떤 삶을 선택할 거야? 뜬금없는 이 물음에 얼마 전 교무 훈련 시 영모묘원에서의 일이 떠 올랐습니다.

중도훈련원 교무 훈련 시 매끼 공양 후에는 영모묘원 산책하는 것이 일과였습니다. 그날도 산책하던 중 갑자기 한 교무가 쪼그리고 앉았습니다. 풀밭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땅바닥에는 ‘네 잎 클로버’가 곳곳에 올라와 있었습니다. “야, 여기 네 잎 클로버가 널렸어!” 교무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우~와! 정말이네.” 다들 쪼그리고 앉아서 네 잎 클로버를 따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멀뚱멀뚱 서 있는 교무가 한 명 있었습니다. 교무들이 물었습니다. “너는 왜 안 따? 얼른 이리 와서 따.” 그러자 서 있던 교무가 말했습니다.


“나는 세 잎 클로버가 더 좋아.” 
후에 그 교무와 식사를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의 일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때 왜 세 잎 클로버가 좋다고 했어? 네 잎 클로버는 ‘행운’을 상징하잖아. 다들 좋은 일이 생길 거라며 좋아하던데.” 그러자 그 교무가 답했습니다. 

“나도 알아. ‘네 잎 클로버’를 따면 굉장히 좋은 일이 나에게 생길 것 같잖아. 실제 네 잎 클로버의 꽃말도 ‘행운’이고. 그런데 나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게 더 좋아.” 교무의 대답은 뜻밖이었습니다. 저는 따지듯이 물었습니다. “왜 일상적인 게 더 좋은데?” 그 교무가 답변했습니다. 

“‘네 잎 클로버’는 지금 내게 없는 거잖아. 내게 없는 걸 바라는 게 뭐야? 일종의 운이고, 요행이잖아. 로또 당첨 같은 거지. 클로버를 따는 건 결국 행복해지기 위한 거잖아. 그런데 그런 데서 나의 행복을 찾는다면 어떻게 되겠어? 내가 행복해질 가능성이 아주 낮아질걸. 생각해 봐. 로또에 당첨되는 건 하늘의 별따기 잖아.” 그제야 저는 고개가 끄덕여지더군요. 그 교무는 다시 제게 물음을 던졌습니다.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이 뭔지 알아?” 저는 교무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웃으면서 그 교무가 말하더군요. “세 잎 클로버는 아무데서나 볼 수 있어. 굳이 찾으려고 애쓸 필요도 없어. 웬만한 풀밭에 가면 다 있으니까.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이야. 나는 행복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 가장 평범한 우리의 일상에 숨어 있는 것. 여기저기, 곳곳에 피어 있는 것. 볼 줄 아는 눈만 있으면 어디서든 딸 수 있는 것. 나는 그게 행복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행운’보다 ‘행복’이 더 좋아. 네 잎 클로버보다 세 잎 클로버가 더 좋아. 내게는 그게 더 값진 거니까.”
  

깨달음은 공(空)과 색(色)을 함께 봐야 
하루는 황벽 선사가 불전에 모신 불상에 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옆에서 지켜보던 사미가 “부처를 구할 필요도 없고, 법을 구할 필요도 없고, 중생을 구할 필요도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절을 하며 무엇을 구하고 계십니까?” 이 말을 듣고서 황벽이 말했습니다. 

“부처를 구할 필요도 없고, 법을 구할 필요도 없고, 중생을 구할 필요도 없지만, 일상의 예법이 이와 같은 일이다.” 이 말끝에 황벽 선사는 손바닥으로 사미를 때렸습니다. 그러자 사미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너무 거칠지 않습니까?” 그러자 황벽 선사가 말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다면) 여기에 무엇이 있다고 거칠다 미세하다 하는가?” 그리고 황벽 선사는 손바닥으로 다시 사미를 때렸습니다. 그러자 사미는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럼 황벽 선사는 왜 사미를 때렸을까요. ‘공(空)’에 갇혀 있는 사미를 일깨우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부처를 구할 필요도 없고, 법을 구할 필요도 없고, 중생을 구할 필요도 없지만, 일상의 예법이 이와 같다”고 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모든 게 비어 있는 ‘공(空)’이지만, 그 ‘공(空)’이 또한 예법으로 자기 모습을 드러내며 작용한다. 그게 바로 ‘색(色)’이다.” 황벽 선사는 사미에게 ‘죽어 있는 공(空)’이 아니라 ‘살아 있는 공(空)’을 일러준 겁니다. 

모든 게 비어 있고, 아무것도 없다면, 손바닥으로 맞을 때 아픔도 없어야지요. 그런데 사미는 아픔을 느꼈습니다. 그게 싫었던 겁니다. 그래서 도망가 버린 거죠. 사미는 왜 아픔을 느꼈을까요. 그 아픔도 비어 있는데 왜 도망을 쳤을까요? 여기에 사미가 보지 못한 ‘동전의 뒷면’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공(空)’의 뒷면입니다. 그게 바로 ‘아이고, 아프다!’라며 작용하는 색(色)입니다. 그런데 그 색(色)을 가만히 살펴보면 또 비어 있습니다. 그 아픔도 비어 있습니다. 그렇게 빈 채로 작용하고, 작용하면서 비어 있고, 빈 채로 또 작용하고…. 그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진리입니다.
 

행복은 가장 평범한
일상에 숨어 있어


행운도 행복도 비움에 있다 
‘무·소·유(無·所·有)’란 세 글자를 들여다보세요. ‘무(無)의 처소(所)가 유(有)다.’ 그걸 풀이하면 ‘없음이 있음 속에 있다’가 됩니다. 이번엔 거꾸로 읽어보세요. ‘유·소·무(有ㆍ所ㆍ無)’. ‘유(有)의 처소가 무(無)다.’ 풀이하면 ‘있음이 없음 속에 있다’가 됩니다. 붓다는 이걸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다시 말해 ‘무소유 = 공즉시색’이 되고, ‘유소무 = 색즉시공’이 되는 겁니다.

스포츠 선수들을 보세요. 감독이나 코치는 항상 “몸에 힘을 빼라”고 말합니다. “긴장을 풀라”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몸에 힘이 들어가면 어깨와 근육이 뻣뻣해지니까요. 결국 자기 실력을 다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그렇게 몸에 힘이 들어가는 근원적인 이유가 뭘까요? 마음에 힘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승리’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의 소유욕으로 인해, 내 안의 에너지를 다 뽑아낼 수가 없게 됩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마음으로 무언가를 ‘꽈∼악!’ 붙들고 있다면 긴장을 하기 마련입니다. 힘이 들어가니까요. 동시에 우리의 하루가 경직되고, 우리의 삶도 뻣뻣해지는 겁니다. 일상의 행복은 비움에 있습니다. 무소유의 삶에 있습니다. 무소유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은 갖지 않는 것이라고 법정스님은 말합니다. 

무소유는 물질의 창고가 비어 있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의 창고가 비어 있는 사람입니다. 부처님과 예수님이 말하는 무소유와 부자의 기준도 재산의 총액이 아니라 집착의 총액입니다. 번뇌와 욕심이 적을수록 무소유의 삶이 되고 집착이 많을수록 천국으로 향하는 천국의 바늘구멍은 좁아지고 집착이 적을수록 바늘구멍은 넓어집니다. 
   

있음의 정체는 ‘없음’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물질의 정체가 ‘없음’이라 했습니다. 그 ‘없음’이 현실에서는 ‘있음’으로 작용합니다. 그걸 깊이 이해할 때 ‘무·소·유(無ㆍ所ㆍ有)’와 ‘유·소·무(有ㆍ所ㆍ無)’의 뜻도 깨닫게 됩니다. 죽을힘을 다해 틀어쥐고 있던 마음의 손아귀를 푸는 겁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고통을 외면하고 번뇌를 외면하고 행복과 행운을 찾는다면 그런 행복과 행운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일상에서 벌어지는 지지고 볶는 현실의 일상을 부정의 대상이 아니라 적극적인 긍정의 대상으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소리에 무서워하지 않는 사자처럼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어려운 상황 속에서 힘을 뺀 슈팅, 자연스런 스윙, 걸림 없는 점프를 하자는 것입니다. 우주에는 ‘소유의 에너지’보다 ‘무소유의 에너지’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큽니다.

올가을엔 머리를 들어 파란 하늘을 많이 쳐다보세요! 또 주변의 푸른 숲을 자주 바라보세요! 숲속에 자라고 있는 많은 나무들과 이름 모를 풀들도 자세히, 따뜻하게 바라보세요! 매일매일 마주치는 인연들을 고마운 마음과 사랑스런 눈빛으로 쳐다봐주세요! 그곳에 행운이 있고 그곳에 일상의 행복이 있습니다.

[2021년 8월 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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