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 이성길 원로교무

유산 이성길 원로교무
유산 이성길 원로교무

[원불교신문=류현진 기자] 20년 넘게 봉사활동에 매진하고 있는 유산 이성길 원로교무(裕山 李性吉·85).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건강한 심신으로 자력 생활하며 연로한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봉사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그는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는 노인들이 안정된 노후생활을 할 수 있도록 헌신봉사한 공을 인정받아 보건복지부장관 표창, 한국재가노인복지협회장 표창, 원광효도마을이사장 감사패, 부송종합사회복지관장 감사장 등 각종 표창장과 감사장을 수상했다.


전재동포구호사업소, 주산종사 만나
함경남도 원산. 이 원로교무의 고향이다. 작은 전기회사를 경영하던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6살 때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후 일본으로 돌아가고자 한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별거에 들어가 가정이 깨져버린다. 혼란스러운 그때, 많은 동포들이 만주에서 귀국해 남쪽으로 가야 산다는 말들을 했다. 이 원로교무는 남한으로 내려오는 무리에 섞여 혈혈단신으로 개성을 거쳐 서울역까지 오게 된다.
개성에서 만난 한 장애인 아저씨가 그를 전재동포구호사업소에 인도했다. 거기서 그는 전재동포구호사업을 벌이던 주산종사를 만났고, 주산종사의 인도로 익산 총부로 오게 된다. 무슨인연의 소치인지 주산종사는 안타깝게도 그만 장티푸스에 걸려 일찍 열반에 든다. “주산종사님이 열반에 드시고 사모님이신 박길선 선진님이 자녀처럼 생각하며 따뜻하게 챙겨주셨어. 정산종사님도 어리다고 특별히 신경 써주시고 사랑을 많이 주셨지.” 그렇게 주산종사의 인도로 7세부터 총부에서의 간사생활이 시작됐다. 


이북에서 온 첫 전무출신 
몸이 좋지 않은 교무들을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보화당으로 약 심부름을 다니는 등 어린 나이지만 민첩하게 일하는 모습이 날렵하고 총기가 있어 그는 어른들의 사랑을 받고 살았다.

육타원 이동진화 선진은 그에게 “성길이는 필시 우리 회상과 인연이 깊은 것 같다. 한때 대종사님이 금강산을 유람하실 때 다람쥐 한 마리가 와 절하며 재롱을 부리니, 대종사께서 무심히 돌멩이를 던졌는데 그 다람쥐가 맞고 그 자리서 죽은 일이 있어. 대종사께서 이북에서 출가하는 첫 사람은 이 다람쥐의 환생이라 말씀하셨는데 성길이가 아마 금강산 그 다람쥐 같다”고 말했다. 6.25 사변을 총부에서 맞은 그는 전후 혼란기라 공부할 적령기를 놓친다. 육타원 종사의 권유로 그는 북일초등학교 4학년에 입학해 간사생활을 하며 총부에서 학교를 다녔다. 

마침 팔타원 황정신행 선진이 제주도에 있는 한국보육원을 국가로부터 위탁받아 원장으로 가서 일하게 된다. 한국보육원 경영을 위해 교단에 인재를 요청해 죽타원 정경호 교무가 공식 파견된다. “팔타원님이 제주도에 와서 공부하라고 나를 부르셨어. 죽타원님이 뒷바라지를 다 해주셔서 제주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했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군에 입대한 그는 제대 후 서울로 올라가 고학으로 국민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한다. “군대를 다녀오니 보육원도 해체되고 인연들이 다 흩어졌어.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에 서울로 올라갔지.” 

그에게 연락이 닿은 죽타원 정경호 교무는 “너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아느냐? 다른 직업도 좋지만 더 좋은 것이 있다. 전무출신을 한번 해봐라. 그리고 이왕에 전무출신을 할 것이면 정남을 해라”고 설득한다. 이 원로교무는 죽타원의 이야기대로 정남으로서 전무출신을 서원하고 대학 졸업 후 다시 익산 총부로 내려온다. 

“오로지 그냥 정남으로 전무출신 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 생각했어. 이북에서 내려올 때부터 인도해주시는 큰 정신이 있어 은혜를 받았어. 대학을 졸업하고 전무출신하는 과정에서 억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어. 전부 주위 인연들의 주선으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뤄졌어.”
 

유산 이성길 원로교무
유산 이성길 원로교무

교단 행정 분야에서 근무 
출가정신을 바로 세우려면 영산에서 근무하는 것이 좋겠다는 죽타원의 권유에 따라 그는 영산선원 중등부 교사로 임명을 받고 전무출신의 길을 시작했다. 총무과장이었던 이산 박정훈 교무의 추천으로 그는 교단행정 분야에 줄곧 근무하게 되어 총무부, 교화부, 수위단회사무처, 원광대학교(총장 비서실, 교무과장, 학적과장, 교학과장), 광주한방병원 등지에서 일해왔다. 그는 원광대 근무시절 교육 발전에 힘쓴 공로로 국민교육헌장 선포 18주년을 맞아 문교부장관 표창을 받기도 했다.

“원광대에서 근무해보라는 권유를 받아서 숭산 총장님이 열반하실 때까지 9년간 모시며 비서실장을 했어. 그 후에 원광대 대학원 교학과장을 맡았는데 그때 사건이 터졌어.” 대학원 입학시험 출제위원이었던 한 여자직원이 아는 이들에게 문제를 유출해 부정입학시험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그는 출제를 담당하지도 않았고, 그 사건과 직접적인 연루가 없었지만 소속 직원의 잘못에 대해 행정적·도의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에 있었기에 사표를 제출한다. 


봉사활동에서 삶의 의미 찾아
잠시 휴식기를 가지고 있던 그에게 원광효도마을에 있던 구타원 오희선 원로교무가 봉사활동을 하는 기회를 가지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다.

“그 누구에게도 변명해 본 적이 없어. 그냥 혼자 감내하고 마음이 괴로울 때였어. 봉사하는 방법으로 진정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1997년에 자원봉사 양성교육을 받고 봉사활동을 시작했지. 원광효도마을에서 봉사하는 기간이 있었기에 마음이 잘 승화됐어. 주로 독거 어르신들이 정신적으로 안정감을 가지고 생활할 수 있도록 벗이 되어주고 생활을 협조해 주는 역할을 해. 처음에는 교무라고 해도 믿지 않았는데 지금은 신뢰하고 많이들 좋아해.” 봉사활동은 하면 할수록 참회가 되고 기쁨이 샘솟는다고 말하는 그는 현재 원광효도마을 소속 어르신 두 분을 돌보고 있다.

원광효도마을뿐만 아니라 부송종합사회복지관 부설 삼동재가노인복지센터, 호스피스 원병원 등 다양한 기관에서 봉사활동을 펼쳐온 그에게는 요즘도 여기저기서 봉사 의뢰 요청이 많이 들어오고 있다. 그가 원병원에서 봉사활동을 펼칠 때 병원에 입원해 있던 고 설윤환 교무는 이 원로교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정남을 서원해 사시는 모습, 언제 뵈어도 깔끔하고 건강하신 자태가 성직의 자존심으로 충만해 보여 존경스럽게 보였다. 백발이 성성한 칠순의 수행자. 언제나 가볍고 부드러운 영성의 기운으로 환우들의 약손되어 주시고, 거침없는 환자수발, 친절히 상담하시는 유산님은 보살의 화현, 간병의 봉사가 몇 갑절 성스럽게 보인다. ‘생사연마는 병원에서 마쳐야겠다. 나의 작은 힘 환자에게 행복 주고, 희망이 살아나고 감사심 솟는 얼굴을 보면서 큰 보람을 얻으니 은혜의 세상이 아닌가!’라는 님의 말씀에 깊은 여운이 있다. 이 생명 다하는 날까지 진리가 기회 주시는 날까지 경건한 수도자의 길 가실 유산님이시여.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다음 생에는 북한 교화 서원
정남으로 살아왔기에 지금까지 자력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 감사하다는 그. 걷기운동과 감사생활이 건강관리 비법이라는 그는 연로한 나이에도 복용하는 약 하나 없을 정도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후진들에게 순수하게 대종사님 정신만 받들고 살자고 당부하는 그가 내생의 서원을 밝혔다.

“다음 생에는 신언서판을 갖춘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북에서 교화하고 싶어. 그게 총부에서 생활하면서 받았던 은혜에 보은하는 길인 것 같아.”

[2021년 9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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