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김세진 기자] “모든 것에 ‘왜’라는 의문표를 가져야 한다.” 효산 손정윤 대봉도 5재식을 마치고 그의 음성을 되뇌어 본다.

기자는 중앙총부 상주선원 간사 시절 『원불교대계』를 처음 접했다. 그때 저자 ‘손정윤’이란 이름을 알게 됐다. 원불교학과 시절엔 강연을 준비하면서 『원불교용어사전』을 보고 다시 ‘손정윤’의 이름을 확인했다. 그 후 효산님을 뵙고 싶었다. 

원불교학과 3학년 교화단별로 진행된 선진님 모시기 시간, 드디어 <원불교신문> 창립의 주역인 효산님을 처음 만나게 됐다.

그는 “신문사는 문화기관이 아니라 언론기관이다. 신문은 진실이 묻어나올 때 감동한다. 제도권에서는 싫어할 수도 있지만 언론의 핵심은 건전한 비판의식이다. 교단의 가치를 세워주되 좋은 것은 좋다고 말할 수 있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지적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강자에겐 강하고 약자는 일깨워줘야 한다”고 전했다. 이어 법위사정의 진리성 회복과 사업성적 폐지를 강조했다. 말씀을  마치고 어두운 총부길을 함께 걸으며 헤어짐을 못내 아쉬워했던 그때의 순간이 왜 아직도 생생한지 모르겠다.

한참 후 원로교무님으로부터 듣게 된 50대 1의 일화도 기억에 남는다. 그 당시는 1977년 유신정권 시대에 원광대학교가 비약적 발전을 이룩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원불교신문> 199호에 실린 ‘학원재단 이사진 강화’란 사설이 발단이었다. 숭산 박길진 총장님의 호출로 효산님은 홀로 원광대학교 교무 50여 명과 설전을 벌였다. 효산님은 ‘정론직필’로 사명을 다했다고 대응했고 사건은 점잖게 마무리됐다.

시간이 흘러 기자는 원불교신문사에 근무하게 됐다. 그의 사설을 찾아봤다. 기자가 태어나기도 전 사설에는 ‘교당과의 격차, 교역자 간의 격차, 의식구조의 양극화 등 교단의 양극화 현상에 대해서 슬기를 모아야 한다’라는 제언과 ‘1급교무, 2급교무, 5급교무니 하는 말은 무엇인가. 과장, 부장, 원장이란 칭호는 신성한 교역자를 모독하는 것이 아닌가. 관료적인 호칭이 없어지고 오직 참 수행인, 구도자들로 가득 차야겠다’라는 강한 어조의 글을 볼 수 있었다. 

또한 ‘자식이 부모보다 더 훌륭해야 하고, 제자가 스승보다 더 위대해야만 그 사회는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방면으로나 선진보다 더 훌륭한 후진이 되어주기를 빌며 인내와 슬기, 거시적 안목과 미래관을 가지고 교단이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기에 용감하기를 바란다’는 희망의 글도 읽을 수 있었다.

효산님을 꼭 다시 뵙고 싶었다. 몇 달 전 원로원 앞 짧은 만남에서 효산님은 손을 꼭 잡아 주셨다. 열반 후 그의 책상에 껴 있는 염불송을 보며 “원불교 최고의 저널리스트라 불리지만 진정한 구도자였다”란 한 스승님의 말씀이 가슴을 울린다.

[2021년 9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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