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은선 교도
안은선 교도

[원불교신문=안은선 교도] 『대종경』 변의품의 ‘짚신 세 벌’ 일화는 무지한 교도에게 매우 의지가 되는 말씀이다. 몰라도 된다. 일심만 가지자. 그러나 짚신 장수가 마음이 열리고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는데, 그때에도 후진들에게 당신처럼 ‘짚신 세 벌’만 외라고 하셨을까. 경전의 본의는 그것은 아닐 것이다. 원불교 개교 당시 교도들은 한 동네 지근거리에서 단순한 삶을 공유했다. 회상 초기의 신심은 순일했을 것이고 너 나 없이 시대를 앞선 가르침에 환희심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과연 그러할까. 세상은 빛의 속도로 진화하고 있고 생활은 복잡해지고 제도와 문화는 끊임없이 경신되고 있다. 교도들은 복잡한 세상 경계 속에서 『정전』과 『대종경』의 말씀을 외로운 등불 삼아 힘겨운 전진을 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 회상은 세상의 변화를 정말 묵묵히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자상하고 정성스러운 가르침을 담은 경전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대종사는 살뜰하게 가르쳐 줬다. 우리 교도들이라면 누구나 탄복할 것이다. 그것은 부단한 현실과의 부딪힘 속에서 재해석되고 풍부해지고 새롭게 나아가야 할 모태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매일 목도하고 있는 현실이 무엇인지조차도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있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세속의 기업보다도 더 현실의 변화에 뒤처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익에 민첩한 기업과 종교의 회상은 다르다는 분별만으로는 가려지지 않는다. 원불교는 여타 종교보다도 훨씬 더, 일찍이, 현실의 삶을 뜨거운 경전으로 품은 종교이지 않던가. 

절실한 수양으로 정신의 경지를 이뤘지만 현실 경계에서 머뭇거리고 때로는 눈감아버린다면 그 온전한 정신은 대체 어디에 쓰임이 있는가. 불같이 일어나는 안이비설신의 작용이 경계를 만들고 너 나 없는 경계가 소모적으로 쉼 없이 부딪힌다면 경전 해석과 취사의 논박에 그 또한 어떤 은혜가 있는가. 그래서 역설적으로 언론에서 ‘교전 참사’로 일컬은 최근의 사태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람만 믿지 말고 그 법을 믿을 것이요”, “열 사람의 법을 응하여 제일 좋은 법으로 믿을 것이요”, “한 편에 착하지 아니할 것이요”, 솔성요론은 현실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요동치는 우리에게 공부의 표준을 제시한다. 현실은 제약이 아니라 경전이고, 경계는 공부거리이다. 지금야말로 공부를 해야 할 때이다. 우리가 부닥친 경계, 교전 사태뿐만 아니라 코로나 위기조차도 어쩌면 우리가 진짜 공부를 해야 할 때라는 은혜다. 내 생각과 착심을 내려놓고 정법으로부터 출발한다면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평소에 얼마나 연마해 왔는지 그 실력이 드러나는 시기이고, 실력을 양성해야 할 시기이다.

우리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우리가’ 법의 정신을 지키고 있었다는 방만하고 나태한 ‘자만’이었는지도 모른다. 회상의 경계에서 우리가 현재 서 있는 자리를 새롭게 자각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실력이 부족했다는 반성과 결코 가볍지 않은 현실을 직면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총부 수위단, 일선 교당 회장단, 교의회에서부터 법을 세우고 뿌리내려야 하는 중차대한 출발선에 서 있다. 따뜻하고 합리적이며 존중받는 권위는 어떻게 세울 수 있는지 재가와 출가가 협력해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더욱 매력적인 교화와 수행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서는 지자 스승의 가르침을 더욱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하지 않을까. 세상에 열려있으되 고요하고 두렷한 정신의 기틀 위에 든든하게 서 있는, 흔들리고 부딪히는 경계를 역동성으로 품는, 그리하여 원망심을 감사심으로 바꾸는 자리, 낙원을 이렇게 만들어 가는 거구나 배우는 자리, 그게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여야 한다.

/원남교당

[2021년 9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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