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희 원불교여성회·(사)한울안운동 사무국장

원불교여성회 신앙실천의 방향성을 짧고 강렬하게 보여주는 가장 효과적인 메시지가 바로 ‘표어’라고 생각한다. 지타원 한지성 대호법은 이 표어를 만들기 위해 아주 오랜 연마를 했다. 원불교여성회의 실천 표어인 “변화하는 여성, 변화시키는 여성”,“더불어하면 쉽고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희망입니다”를 보면 지난 25년간 여성회가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나아갔는지, 그 구체적 방법은 무엇이었는지 압축해서 소개할 수 있다.


변화하는 여성, 변화시키는 여성: 신앙의 이중과제
‘이중과제론’은 1999년 계간 『창작과비평』 가을호에 실린 백낙청 교수의 「한반도에서의 식민성 문제와 근대 한국의 이중과제」라는 글로 시작된 논의다. 우리 사회의 진보와 보수는 대체적으로 ‘근대성’에 대한 시각이 서로 달라서 나뉘게 된다. 보수적인 사람들은 우리가 아직 충분히 ‘근대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개발을 더 해서 경제를 발전시키고 선진국의 물질문명 수준을 따라가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진보적인 사람들은 그런 물질중심의 근대를 이제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백낙청 교수는 위의 글에서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삶의 현실이 되어버린 근대 및 근대성을 제대로 감당할 줄 모르고서는 ‘근대극복’이 기껏해야 공허한 논의가 될 것이며, 심지어는 온갖 종류의 퇴행적인 정치적 입장이나 사회적 행위를 정당화하는 해로운 논의로 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제시한다. 그래서 우리는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을 동시에 해나가야하는 ‘이중과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 이 논의의 핵심이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에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신의 업장과 생사문제를 해결하고 우주적 성리를 깨쳐야 하는 ‘소승’의 과제가 있다. 그러나 이게 전부가 아니라 온 생령을 모두 제도해야 하는 ‘대승’의 과제도 있다. 원불교인들은 ‘제생의세’를 서원으로 삼아 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지만, 일단 ‘나’부터 부처가 되지 않으면 누굴 어디로 끌고 가고 또 누가 따라간다고 하겠는가. 그러니 일단 ‘변화하는 여성’ 즉, 내가 변화를 해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다시 ‘변화시키는 여성’ 즉, 보살행을 나투는 대승적 신앙을 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이중과제’ 즉, 이 둘이 각각의 과제가 아니라 동시에 함께 해야 하는 ‘이중적’ 과제라는 점이다. 

개인적 차원이 아닌 교단적 차원에서도 ‘적응’과 ‘극복’의 이중과제는 잘 적용된다. 원불교는 ‘종교’라는 근대적 개념에 ‘적응’하기 위해 약 100년간 노력해왔다. 그러나 대종사의 개교의 동기는 단지 ‘적응’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원만한 대도’가 아니었던 과거의 종교를 ‘극복’해 ‘광대무량하고 원만한 종교’가 되자고 했다. 우리 교단도 그렇게 ‘적응’과 ‘극복’의 이중과제를 가지고 있는데, 이 두 가지를 따로 하고자 하면 갈등만 커진다. 그래서 여성회에서는 ‘변화하는 여성, 변화시키는 여성’이 되자고 지난 25년간 외쳤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세상 삼라만상의 작용에 통달한 ‘변화하는 여성’이 가족과 동지와 교당과 교단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하면 쉽고 아름답습니다: 집단적 진보와 삼동윤리
사단법인 한울안운동은 원불교여성회를 주축으로 대사회 공헌 활동을 하기 위해 만든 비영리법인이다. 법인과 함께 이 표어를 만들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지점에서 한지성 초대 여성회장의 생각이 발전했다고 본다. 

첫째, 집단적 진보에 대한 확신이다. 어느 날 한 여성회장이 “선희야, 한 사람에게 천만 원을 받으려 하지 말고, 천명이 만 원씩 내는 조직을 만들어야겠다. 그런 조직이 세상을 살리는 조직이다”라고 했다. 가능성 있는 한 사람을 설득해서 천만 원을 내게 하는 것이 무작위로 모인 천명이 만 원을 내게 하는 것보다 쉬울 것이다. 하지만, 천 명에게 자발적으로 만 원을 내게 하는 영감을 줄 수 있다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더 많은 일도 함께하자고 권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럴 때의 에너지는 천 명의 것이 한 명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크기가 되리라는 것 또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집단적 진보이고, 대종사의 교법이 그리고 우리 교단이 바로 그 일을 하기 위해 불법의 새 회상을 만든 게 아닐까. 대승불교가 어떻게 완성이 되겠는가. 천여래 만보살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이러한 집단적 진보가 있어야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나아간 두 번째 생각이 바로 삼동윤리의 실천이다. 원불교 사람들은 ‘하나’라는 말도 좋아하고, ‘삼동윤리’도 무척 좋아한다. 원불교가 타종교에 대해 가장 개방적이고 배타적이지 않다고 우리는 생각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천여래 만보살’의 숫자에 다른 종교 사람도 들어 있는가? 오로지 ‘원불교 교도’만 가능하다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한울안운동을 제창하며 한지성 초대 여성회장은 테두리가 희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원불교 교도가 아닌 사람들도 경계심 없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조직이 돼야 우리 원불교가 ‘삼동윤리’를 세계 인류에게 떳떳하게 말할 수 있게 되지 않겠는가. 테두리가 확고하다는 건 이미 굳어졌다는 뜻인데, 영어로 단단한 기반에 확고히 자리를 잡는다는 ‘establishment’라는 단어가 ‘권력, 권위조직, 지배체제, 특권계급’을 뜻하기도 한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놀랍게도 물리학에서 이렇게 딱 굳어진 물질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운동은 회전운동밖에 없다. 즉, 그 자리에서 맴맴 도는 것밖에 못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불어’ 해야한다. 더불어 할 때 쉽고 아름다울 것은 분명하다.


우리가 희망입니다: 출재가남녀 차별 없는 원만평등의 교단
이 표어는 원기89년(2004) 원불교여성회 전국훈련을 위해 만들어졌다. 소태산대종사 탄생100주년을 시작으로 교단에 아주 굵직한 행사가 이어졌고, 그렇게 원불교 100년을 결산하며 교단에서는 원불교의 미래와 발전을 놓고 볼 때 ‘인재의 부족’이 가장 심각하다고 진단했다. 그때 여성회의 대답이 바로 “우리가 희망입니다” 였다. 정말 대담하고 또 감동스런 표어가 아닐 수 없다. 

여성회에서 인재는 사회에서 말하는 ‘실력’이 아니라 우리 교법이 추구하는 ‘공부인의 인격’을 갖춰야 한다. 혼자서 100점 맞으려 하지 말고, 차라리 다같이 70점쯤 맞자는 것이 우리 공동체가 추구하는 인재였다. 그리고 이렇게 다 같이 70점쯤으로 발맞춰 나아가는 것이 위에서 말한 ‘집단적 진보’의 길이기도 하다. 남보다 앞서나가지 않으려는 것, ‘나’라는 주장을 내리고 ‘집단’이 다 함께 가기를 목표하는 것이 ‘대승적 공부인의 인격’이고 이 인격을 갖춘 사람이 인재이다. 

교단에 희망이 있으려면 인재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교단의 인재는 과거시대의 기준과는 완전히 달라야 한다. 혹시라도 천여래 만보살의 씨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고, 될성부른 떡잎만 골라내서 밀어줘야 한다는 게 교단의 인재관이라면 정말 곤란하다. 그런 점에서 출가와 재가, 남자와 여자의 차별은 과거 시대에 ‘집단적 진보’를 막는 가장 높은 벽이었고, 대종사도 그런 이유로 이 벽을 서둘러 없애야 한다고 했다. 

‘우리가 희망입니다’라고 말했는데, 아무도 들어주는 이가 없다면 참 서글픈 일일 것 같다. 그런데 솔직히 이 표어가 나온지 17년이 지났지만, 즉, ‘우리가 희망’이라고 계속 어필하고 있지만, 어쩐지 교단으로부터 만족할만한 응답을 들은 것 같지는 않다. 부디 교단에서는 이 여성회의 힘을, 재가들의 힘을 제대로 가져다 쓰기를 부탁한다. 사회에서 인정해주는 일류의 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한다 해도, 원불교 교도 집단은 분명히 사회의 다른 집단과 격이 다른 공부심과 도덕성, 그리고 영육쌍전의 실천력을 가지고 있다. 


창조적 발전을 위해 
‘절망’과 ‘희망’의 경계를 가르는 여러 요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창조성’이라고 생각한다. 즉 어떠한 일이 진행되는데, 그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 ‘창조적 발전’의 기미가 있다면 절망보다는 희망을 더 갖게되고, 창조적 발전 가능성을 도저히 찾을 수 없을 때 절망하게 된다. 

원불교인에게 ‘창조적 발전’이란 진급의 길이요, 제생의세의 길이다. 그러나 이 길은 저절로 가게 되지 않고 인과보응의 신앙문, 진공묘유의 수행문을 ‘의식적으로’ 잘 통과하며 가야 한다. 그러나 공부길을 찾는 건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그 ‘의식’의 자리에 아차 하면 ‘허위의식’이 자리를 잡기 때문이다. 우리가 뭔가를 분명히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고, 치열하게 고민도 하고, 그래서 변화하려고도 하는데 가도가도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 이것이 ‘허위의식’이 아니었나 반성해봐야 한다. ‘허위의식’이 무서운 점은, 이것은 진실을 적극적으로 은혜하고 왜곡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즉, ‘열심히 살았으므로’ 잘못한 것은 없다고 자기합리화를 하게 된다. 

창조적 모험, 창조적 발전이 없는 삶이란 퇴보하는 수밖에 없다. 최첨단의 물질문명은 참으로 위압적이고 거부하기 힘들다. 그 물질문명에 질식하지 않고 물질개벽에 잘 ‘적응’하는 과제와 대종사의 정신개벽운동으로 그 물질문명을 ‘극복’하는 과제까지 성공적으로 실천하는 자랑스런 새종교, 원불교가 되기를 기원한다.

※ 이 글은 영산선학대학교 선학연구원과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이 주관한 제3회 법인절기념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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