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기106년 8월 21일 법인절기념식 법문

 

 

창립정신이 교단의 생명
한때 정산종사께서 “서울의 부호 한 사람이 무거운 소금 지게를 지고 가업을 일군 조상들을 기리며 그 소금 지게를 사당에 보관해 대대로 근검한 정신을 잊지 않았다”는 예화를 말씀하시며, 우리 교단도 소태산 대종사님과 구인선진들의 근검과 혈성으로 이뤄진 사업의 근본을 한시라도 잊지 말아야 함을 극진히 당부하셨습니다.
돌이켜보면 교단이 어느 한때인들 어렵지 않은 때가 있었겠습니까만 제가 생각해 볼 때 제일 힘들었던 시기는 대종사께서 대각을 하시고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교도 한 명 없고, 재산 하나 없었던 그때였을 거로 생각합니다. 이 큰 대도회상을 창립하시고자 하셨을 때, 그 곤란과 어려움은 가히 어떠셨을까요.


대종사께서 아홉 제자와 함께 언답을 막으시고, 기도를 올리시면서 교단 창업의 그 험난한 과정을 거치면서 나온 결정이 바로 ‘창립정신(創立精神)’입니다. 이 정신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 교단이 100년 역사에 기적과도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창립정신은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이소성대(以小成大), 일심합력(一心合力, 사무여한(死無餘恨)’ 입니다. 그러나 이 창립정신을 선반 위에 올려놓고 그저 바라만 보고 숭배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항상 꿈틀대고 살아있어야 할 정신입니다. 그래야 교단에 생기가 돌고 힘이 있으며, 대종사께서 하시고자 하는 그 일이 반드시 이뤄질 것입니다.

 

 

이소성대는 천리의 원칙이라
이소성대라 하는 것은 말씀 그대로 ‘작은 것으로써 큰 것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소성대의 정신을 가지고 사는 삶은 어떠한 모습일까요? 성실하고 근실한 정신을 가지고 사는 분은 분명 그 생활도 이소성대의 결과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는 허황되고 요행스러운 꿈을 가지고 요동하는 모습이 아닌 차근차근, 순서있게, 하나하나에 공들이며 진실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처음 이소성대라는 말을 들을 때, “그래. 작은 것으로써 큰 것이 이루어지지. 작은 것에 공들여야 큰 것을 이룬다는 말씀이로구나.”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어느 때 융산 송천은 종사께서 총부 기념관 법회 석상에서 설법하신 이소성대 법문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융산님께서는 이소성대를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작은 것에 공들인다’ 할 때 그 목표가 언제나 큰 것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큰 것을 얻기 전에는 마음에 양이 차지도 않고 항상 부족하고 불만이 생기며, 자칫 자신을 자책할 수도 있습니다. 교화 선상에서도 교무님들이 교도가 한 100명은 나와야겠는데 50명이 나오면 마음에 한없이 부족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이소성대를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기쁘게 정진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아침에 선(禪)을 통해 대입정(大入定)에 드는 것을 목표로 공부하지만, 설사 그러한 경지에 들지 못했어도 단 30초라도, 1분이라도 그 자리에 들었다면 “아. 내가 오늘 입정 맛을 봤구나”하며 그렇게 기쁘고 좋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음 날 30초를 1초라도 더 늘리려고 노력하게 될 것이며, 작은 것 하나하나 성취하는 것이 아주 큰 보람으로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평소에는 기쁘지 않다가 마지막에 가서 기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서원은 굳게 세우되 욕심을 부리지 말고 그때그때, 하나하나 이루어지고 변화하는데 성취감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소성대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법문이 될 것입니다.


또한 대종사께서는 이소성대를 ‘천리의 원칙’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천리의 원칙이라는 것은 성리(性理)인 동시에 진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소성대를 다시 생각해보면 소(小)가 대(大)이고, 대가 곧 소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을 달리 말하면 작은 것을 볼 때, 그 작은 것 하나라도 귀하고 크게 여기면 그것이 곧 대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크다는 대를 볼 때 어마어마하여 나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것 또한 하나하나, 차근차근 해나가다 보면 대가 곧 소가 되는 것입니다.


대산종사께서는 “우리가 어떤 일을 해나갈 때 차분하게, 차서있게, 착실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그 뜻을 생각해보니 바로 ‘삼학공부(三學工夫)’였습니다. 차분, 차서, 착실은 수양, 연구, 취사 삼학인데 그렇게 표현해주시니까 훨씬 느낌이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이 법문도 이소성대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소성대의 정신을 갖고 살면 절대로 조동하지 않고, 경동하지 않고, 망동하지 않는 원불교인의 생활을 견지해갈 수 있습니다.


또한 좌산상사께서 ‘일과(日課)에서 득력(得力)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득력이란 삼대력(三大力)을 얻는다, 부처가 된다는 말씀인데 이 얼마나 큰 목표이고 큰 자리입니까. 그러나 그것을 이루는 길이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고 청소하고 낮에 일하고 저녁에 자는 이 일과 가운데 공부가 들어있다는 뜻입니다. 이 또한 이소성대의 가르침입니다.

 

 

일심합력이 출가위 심법
또한 우리는 이소성대로 사는 가운데 일심합력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디에 일심합력을 해야 할까요? 바로 ‘교단 대의(大義)’에 일심합력을 해야 합니다. 교단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내가 아는 사람, 나하고 친한 사람, 나하고 먼 사람, 나를 미워하는 사람, 그 누가 하든 그 일에 합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회상의 가장 큰 힘이고 특징입니다.


예전에 서타원 박청수 종사께 말씀을 받든 적이 있습니다. 그 어른은 그 큰일을 하면서도 당신 인연들을 통해 불사를 하셨지, 대중에게 무엇을 도와달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국가에서 한겨레 중고등학교 법인을 선정할 때 당장 학교 부지를 마련해야 했으므로 딱 한 번 대중한테 도와달라고 부탁을 하게 됐습니다.


서타원님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금을 준비할 대책도 없고, 교단에서도 도와줄 여력도 없었기에 교역자광장에 어렵게 글을 올리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날부터 전국에서 후원금이 들어오는데 생전 이름도 모르는 교무님으로부터 어렵게 사는 교당, 그리고 재가교도님들의 성금이 십시일반 모이기 시작해 단 10일 만에 목표한 금액이 모두 걷히게 됐습니다. 정말 묘한 것은 땅 살 만큼 모금된 뒤로는 더 이상 들어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서타원님은 “우리 원불교가 이런 힘이 있구나. 그동안 내 힘으로 불사를 한 줄 알았는데 회상의 큰 힘이 바탕해서 이렇게 이뤄지는 것이구나”하고 크게 자각하셨다고 합니다. 교단의 일심합력의 힘이 오늘날 한겨레 중고등학교를 설립하게 된 저력이 된 것입니다.


나아가 대의는 ‘공의(公議)’입니다. 대중공사를 통해서 결정한 일, 그 일에는 우리가 다 합력을 해야 합니다. 그 마음을 갖고 사는 것이 주인정신이며, 일심합력이 곧 출가위의 심법인 것입니다. 

 

 

사무여한, 죽기 전까지 정성 다해야
원기60년대 당시 교단은 눈앞에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절대절명의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교무훈련을 나는 교역자들의 어깨가 축 처져 있어 누군가는 그분들에게 힘을 실어줘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교무부장으로 계셨던 좌산상사께서 첫 강사로 모셔졌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의기소침해 있는 교무들에게 좌산상사님은 “아 제가 요새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대종사님이 참으로 원망스럽습니다”하고 말문을 여셨습니다. 대중은 그 말씀을 듣고 모두가 깜짝 놀라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 어른은 그 말씀을 절대 해서는 안될 양반인데 저 말씀이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하며 고개를 번쩍 들고 경청하게 됐습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고생을 하는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대종사님께서 우리보고 죽으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반드시 되기는 하는데, 너희들이 죽어야 한다. 죽기 직전까지 가야 일이 된다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대종사님을 원망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하니 그제서야 대중들이 말귀를 알아듣고 한바탕 웃게 됐습니다. 그때 대중들의 마음에 어두운 기운이 확 걷혀졌습니다.


그렇습니다. 대종사님 말씀처럼 교단의 모든 일들이 일천정성을 다해서 죽기 직전까지 가야 다시 살아나고 그 일이 되어집니다. 그러므로 원불교 창립정신의 핵심은 ‘사무여한’이라는 말씀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또한 사무여한은 대산종사께서 말씀하신 여래의 삼대불공인 ‘불석신명불공(不惜身命佛供)·금욕난행불공(禁慾難行佛供)·희사만행불공(喜捨萬行佛供)’ 그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합치면 사무여한입니다. 불석신명은 “이 생명을 아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금욕난행입니다. 일상생활 가운데에서 욕심을 참고, 하기 어려운 일을 견디며 적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금욕난행에 그쳐 버리면 몸과 마음에 병이 나게 됩니다. 마지막 세 번째인 희사만행이 돼야 합니다. 그 고생을 하면서도 그 힘듦으로 인해서 내가 병들고 내 마음이 퇴보되는 것이 아니라, 희사만행 즉 기쁘게 불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이요, 주인정신입니다. 나는 이 세 마음이 뭉친 것이 바로 사무여한이라 생각합니다.


정산종사께서도 “우리가 창립 당초에 9인과 같은 그러한 단결과 정신을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차츰차츰 무뎌지는 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그렇지만 이 창립정신을 더욱 챙기고, 새기고, 마음에 대조할 때 교단의 힘이 되어질 것입니다. 소태산 대종사님의 정신개벽 공사를 하려면 결국 이 창립정신이 우리의 가슴에 살아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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