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진희 예비교무
원진희 예비교무

[원불교신문=원진희 예비교무] 처음으로 해외봉사를 하러 갔던 캄보디아에서 전무출신을 해야겠다는 꿈을 가졌고, 지금 나는 예비교무로 살고 있다. 전무출신을 서원하고 살고 있는 이 짧은 기간 동안 내게는 살아온 시간 중 강력하고도 큰 변화가 하나 생긴 것 같다. ‘세상과 함께 살고 싶다는 것’, 모두가 함께하는 세상을 생각하고, 그려가게 됐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기도문을 쓸 때, 심고를 모실 때, 마지막 즈음에 세상에 대한 간절한 서원을 잊지 않고 넣을 수 있게 해줬다.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먼저 손 내밀어 외면하지 않게 하소서.”

입학한 후부터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선(禪)을 배우고 익히는 중이다. 처음에는 앉아있는 것만 해도 퍽 고통스럽고 힘들었다. 그랬던 내가 요즘은 아주 잠시라도 기운을 주해보려 하고, 일상생활을 하는 중에 잠깐 멈춰도 본다. 그리고 세상의 소리에 귀도 기울여 본다.

며칠 전, 일기를 쓰려 책상에 앉았다. 어떤 날은 쓰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 고르기가 힘이 드는데, 어떤 날은 필름이 끊긴 것처럼 기록할 것이 없어서 그렇게 힘이 든다. 그날도 어김없이 힘이 들었는지, 의자에 기대어 앉아 밖을 쳐다봤다. 당연히 어두워 보이는 것이 없었지만, 유난히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던 날이었다. 눈을 감았다. 작은 소리마저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고요해지기를 기다렸다. 신기한 것은 내가 고요해질수록, 안정을 찾아갈수록 소리는 선명해졌다. 나는 그날 밤, 바람소리, 귀뚜라미 소리, 나뭇잎 소리 등 아침 선 시간에 가끔 들을 수 있었던 세상의 소리를 선물 받았다.

안과 밖, 아주 짧았지만 세상의 모든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경종이 울렸다. 울림과 울림 사이에 그윽함이 있었다. 어두워 보이지 않았던 밖에서도 훤히 보이던 안에서도 수많은 것들은 서로 부딪히며 소리가 났다. 우리들의 떨림으로 만들어지는 소리는 순간마다 매질(媒質)을 만나 진동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귀뚜라미는 바람을 만나 그 소리를 울렸고, 바람은 허공을 만나 소리를 낸다. 텅 비어 보이는 허공이지만 소리는 매질을 통해 전달되듯, 가득 차 있는 허공이 있어 나는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은 홀로 소리치지 못하고, 혼자서 울지 못하는 것임을 알게 됐다. 하물며 시방세계를 내 집 삼는 우리는 온 세상과 만날 수밖에 없다. 그 실체는 은혜임을 알아차린다. 즉, 상생의 연속이어야 한다. ‘세상과 함께 살고 싶다는 것’은 세상이 소리칠 때, 작은 한 소리도 놓치지 않을 수 있게, 텅 비었고 가득 찬 허공을 내 것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임을 울림을 통해 느껴본다. 대산종사는 ‘크게 텅 빈 마음과 크게 공변된 마음’이 일체 생령을 구제한다고 말씀했다. 내가 비어있지 않으면 속이 시끄럽다. 내가 시끄러우면 세상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들을 수 없다.

‘다 함께 잘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던, 막연해 보이지만 찬란한 나의 꿈, 나의 서원은 내 마음의 평화로부터 온다. 시끄럽지 않게 텅 비어있는 내 마음의 평화가 세상의 평화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나는 오늘도 세상을 통해 배웠다. 은혜로부터 배웠다.

큰 서원으로 내딛었고, 찬란한 꿈을 꾸고 있으니 서두르지 말고 한 걸음씩 실행해야 한다. 남들보다 짧은 예비교무 시절을 보내고 있기에 조급함과 불안함은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때로는 작은 우물에 갇혀 있는 듯해서 시야가 좁아질까 걱정도 됐다. 그렇지만 작은 소리조차도 세상과 함께 울고 있음을 알았으니, 걱정은 넣어두자. 세상은 어디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와 ‘동지’와 주변의 ‘모든 것’들이 곧 세상이기에, 나는 “오늘도 사랑하자”고 다짐해 본다.

/원광대학교

[2021년 11월 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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