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기106년도 7차·10차 전무출신 훈증설법

 

 

학인의 자성정혜(自性定慧)와 수상문정혜(隨相門定慧)에 대한 질문에

정산종사 답하시기를 “경계를 대하되 정한 상 없음이 자성 정(定)이요,

밝되 혜의 상 없음이 자성 혜(慧)며, 정을 닦되 정하는 상 있음이 수상문 정이요,

혜를 닦되 혜의 상 있음이 수상문 혜니라.”


 『정산종사법어』 경의편 48장

 

문: 경계를 대할 때마다 일상수행의 요법 1·2·3조를 대조하면서 반야심경의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의 공부와 통하지 않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요란하고 어리석어지고 글러지는 이 마음을 어떻게 하는 것이 법답게 심신작용을 처리하는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답: 법다운 심신작용, 법다운 심법은 우리가 늘 공부하는 ‘온전·생각·취사공부’를 말합니다. 『수심결』에서는 자성문정혜를 “돈오문 가운데 자성을 떠나지 아니하고 정과 혜를 평등하게 가지는 것이라” 하셨고, 수상문정혜는 “자성에 맞추어 흩어진 마음을 거두며 법을 택하고 공을 관하되 혼침과 산란을 고르게 골라 써 함이 없는 데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공부인이 처음에는 자신의 성품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기 때문에 그 요란한 마음을 붙잡고 움직이지 않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이것은 돈오문인 수상문정혜의 공부길을 대치하는 수행입니다. 물론 그렇게 해서도 공을 쌓아갈 수는 있겠지만 이러한 공부는 곧 한계에 부딪치게 됩니다.


우리가 법마상전급 과정에서 좀 더 성숙한 공부에 들어가려면 마음을 성품자리를 비춰서 공을 들여야 참다운 수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법(心法)이라고 하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늘 조석으로, 경계를 대할 때마다 외우고 대조하는 ‘일상수행의 요법’을 실천하는데 그 답이 있습니다.


그 일 그 일 자성의 정과 혜와 계를 세우고, 신분의성의 원동력을 발현하며, 감사생활과 자력생활을 하고, 잘 배우는 사람, 잘 가르치는 사람, 공익심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법다운 공부이며 대종사님의 교법을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산종사께서는 “평생 ‘일상수행의 요법’만 읽고 실행하여도 성불(成佛)에 족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이 마음이 나인 줄 알고 공부를 하다가 나의 참다운 실체인 본성에 대해 확연하지는 않지만 차츰 이해가 생기게 됐습니다. 그런 후 더 깊게 공부하다 보면 자성의 소식이 온전히 마음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들어온다고 해서 자기의 인격까지 바로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공부가 좀 더 쉬워집니다. 그전에는 일주일, 한 달 갈 번뇌도 하루면 되고, 2~3일 머물렀던 번뇌도 오래지 않아 비워 내고 씻어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성품 자리에 비춰 쓸어내고 쓸어내고 쓸어내다 보면 관조(觀照)의 힘이 커져서 설사 경계를 당해 마음이 일어나고 조금은 흔들릴지언정 바로 본체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오래오래 공들여야 합니다. 다시 말해 본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는 공부는 수상문정혜이고, 본성을 깨달아 닦아가는 공부는 자성문정혜입니다.


그러나 공부인이 비록 자력으로 그 진리를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대종사께서 ‘일원상(一圓相)’으로 우리의 자성 자리를 환하고 두렷하게 밝혀놓으셨습니다. 누구든지 바로 확인하며 수행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대종사님의 한량없는 자비이십니다.


다만 한가지 유의할 점은 대종사님 말씀을 믿고 거기에 의지해서 공부를 해야 하지만 믿음만을 바탕한 공부는 그 힘이 견고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오래오래 계속하다 보면 ‘묵식심통(黙識心通)’이라. 묵묵히 안으로 알아져서 그 마음이 통해집니다. 정성스럽게 정진하다 보면 내 마음에 짐작 가는 한 소식이 생기는 것이며, 그때에는 누구에게 물어볼 것도 없습니다. 어른들 말씀하신 것을 보면 스스로 “아! 다 이 자리를 말씀하셨구나”하며 그 자리를 지키고, 그 자리를 가지며, 그 마음으로 생활하고, 경계를 당해서 그 마음을 쓸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참다운 공부길이 잡힌 것이요, 그때부터 공부가 수월하고 빠르게 진행됩니다. 어떤 분은 삼학병진 공부가 늦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잘 모르는 사람들의 생각이요, 어리석음입니다. 삼학병진이 훨씬 그 힘이 크고 우월하다는 것을 우리는 자신해야 하겠습니다.


문: 대산종사께서 동지의 도에서 “어떠한 경우에도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미워하지 말고 놓아버리지 말고 보살펴주고 깨우쳐 주고 이끌어 주는 마음의 스승, 마음의 벗이 되라”고 부촉하셨는데, 제가 역량이 부족해서 미워하는 마음이 잘 해결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동지간에 윤기를 건네며 살 수 있을까요.


답: 예전에 대산종사께서는 “그 일만 바루고 사람은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하면 교단도 살고, 그 사람도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라고 자주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사람인지라 살다 보면 법문에 의지해서 미운 마음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잘되지 않는 것 또한 인지상정입니다. 또한 그 일이 지나가면 선입견을 갖지 말아야 하는데 그 관념과 집착이 오래가기 마련입니다.


한 제자가 대산종사께 어떤 동지의 잘못을 보고하니 “아! 그 사람 주소가 바뀌었더라”하시며 그 말을 일체 들으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을 바루려는 노력은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도덕을 상하면서까지 그 일을 처리하는 것은 본말이 뒤집히는 일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차라리 일이 조금 잘못될지언정 도덕이 상해버린다면 그 일을 아무리 잘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결코 정의(情誼)를 상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정산종사께서는 “세상에 제일 중한 것이 동지간의 정의니, 우리들의 정의는 억 만년도 더 갈 정의니라. 동지간의 의리를 배반하지 말며, 잘못한 동지라도 아주 버리지 말며, 동지간의 정의를 많이 역설하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동지간의 잘못을 서로 제 잘못으로 알고 자기의 잘못을 살필지언정 동지를 원망하고 미워하지 말며 서로가 용서하고 깨우쳐 나아가면 정의가 상통하여 법의 맥이 서로 연할 것이라”고 간곡히 당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동지간 정의를 상하는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법과 마를 일일이 분석하고 우리의 경전 해석에 과히 착오가 없으며,

천만 경계 중에서 사심을 제거하는 데 재미를 붙이고

무관사(無關事)에 동하지 않으며,

법마상전의 뜻을 알아 법마상전을 하되

인생의 요도와 공부의 요도에 대기사(大忌事)는 아니하고,

세밀한 일이라도 반수 이상 법의 승(勝)을 얻는 사람의 급이요, 


『정전』 법위등급, 법마상전급

 

문: 공부길 잡는 법에 대해 좀 더 상세한 말씀을 받들고 싶습니다. 오랫동안 정진을 한다고 하는 데도 변화가 되지 않고, 항상 요원하다는 생각에 서원이 무뎌지기도 합니다.


답: 그렇습니다. 공부는 경계 속에서 하는 것입니다. 경계를 떠나서 하는 공부는 그 공효가 크지 않습니다. 경계 속에서 단련하는 공부라야 사회에 유익이 미치고 공익을 향상시키는 진정한 용심법(用心法)이 될 것입니다.
예전에 향산종사께서는 대종사님께서 “공부길 잡았냐?”는 말씀을 제자들에게 많이 물어보셨다고 하셨습니다. 공부길을 잡는 것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만일 세월이 흘렀는데도 변화가 되지 않았다면 자신이 공부길을 잡고 살았는지, 잡지 못하고 살았는지를 반드시 성찰해 봐야 합니다. 공부길 잡은 사람은 변화가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아침 재미있는 표현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공·공·공”입니다. 첫 번째 공은 ‘빌 공(空)’입니다. 두 번째 공은 ‘공변될 공(公)’입니다. 세 번째 공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공들일 공(功)’입니다.


제가 다산종사를 모시고 살 때 “앞으로 공부를 할 때 복잡하게 하지 말고 간단하게 한마디로! 그렇게 표준 잡고 공부하면 괜찮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너에게는 ‘항상 상(常)자를 주련다’ 하시며 ‘상이라는 것은 항상 한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여여(如如)하게’ 한결같이 변함없이 공부하라는 것이다”라고 그 뜻을 새겨주셨습니다. 이 ‘같을 여(如)’는 변함이 없으므로 빌 공(空)과 같은 것입니다. 만일 마음에 무엇이 있으면 절대로 같을 수가 없습니다. 있는 것은 변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공부할 때 ‘빌 공’은 공부의 체가 되고 기본이 됩니다. 불가에서 공 도리를 강조하는 것도 그 뜻이 매우 깊습니다. 그러나 대종사님께서는 빌 공에 그치지 않고 ‘공변될 공’이 돼야 한다고 특징 잡아서 밝혀주셨습니다. 진공묘유의 수행문은 ‘빌 공’을 표준 한다면 인과보응의 신앙문은 ‘공변될 공’이 그 중심이 됩니다. 이 두 가지 공부길이 있기에 우리가 복혜(福慧)를 겸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 더 붙인다면 ‘공들일 공’입니다. 물론 공부가 빨리 성취되는 분도 있겠지만, 대종사님께서 밝혀주신 교법대로 우리의 삶과 일과 속에서 마음을 챙겨서 오늘도 해보고, 내일도 해보고, 이달도 해보고, 내달도 해보는 평범 속의 공부가 적공이 되는 까닭입니다.


우리가 공부하는데 『정전』 법마상전급 조목에 보면 “천만 경계 중에서 사심을 제거하는 데 재미를 붙이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공부하는 데 재미가 나야 합니다. 누구에게 “나는 이렇게 공부한다”고 말할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고, 내 스스로 표준을 잡고 공들이고 또 공들일 때 재미가 나는 것이며 그 힘이 주위에도 미쳐가는 것입니다. 비록 교단에 희망이 보이지 않고, 마음이 가라앉을 때도 한마음 크

게 돌려 전부 내 일로 알고 다시 공부에 전념하는 심법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최근 일련의 사태를 통해 재가출가 법동지 한 분 한 분께 진실로 미안한 마음이 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은 대종사님 교법을 표준 해서 자신의 일상생활에 단 하나라도 그 심법을 실천하고 체득하는 것이며, 일원대도 정법이 세상에 편만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각자 각자가 모두 주인이 되어 교단 3대를 원만히 마감하고 교단 4대를 힘차게 열어갈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다 함께 거듭날 것을 서원하고 염원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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