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근마음상담연구센터

 

이은주(보은)  상담연구원
이은주(보은) 상담연구원

 

내가 아동학대를 했다구요?!
꽉 다문 입술, 활짝 문을 열어젖힌 채 들어오지 않고 서서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는 40대로 보이는 남성이 있다. 어서 오시라 맞이하는 내 인사를 묵살한 채, 거칠게 의자를 빼서 앉아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린다. 나는 차를 권해보기도 하고 오시는 데 불편함이 없었는지 물어도 보지만 애들 말로 ‘씹히는’ 무응답이 돌아온다.


나는 아동학대 행위자로서의 부모를 만나 상담과 교육을 하는 일을 하고 있으며 오늘 이 거친 방문객도 자녀에 대한 훈육이 아동학대로 판단돼서 법적명령을 받고 억지로 상담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낯설고도 어마 무시한 느낌이 드는 ‘학대’라는 용어는 주로 매스컴을 통해 사건으로 접하는 경우가 많다. 기사가 나올 때마다 다같이 피해 아동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행위자에 분노하며, 그의 정신질환을 의심하거나, 아동과의 법적관계를 추측하기도 한다. 그런데, 집에서 멀쩡히 애들 키우느라 일명 ‘쎄가 빠지게’ 일하고 돈 벌어서 교육시키느라 허리가 휘는데, 그런 자신을 보고 ‘학대 행위자’라니 청천병력이고, 어불성설이고,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일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놀랍게도 2020년 기준 아동학대가 일어난 대부분의 장소는 가정이고, 행위자는 80%가 부모라는 아동권리보장원의 통계가 있다.


아동복지법에서 정의하는 아동학대란 보호자를 포함한 성인이 아동의 건강 또는 복지를 해치거나 정상적 발달을 저해할 수 있는 신체적·정신적·성적 폭력이나 가혹행위를 하는 것과 아동의 보호자가 아동을 유기하거나 방임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아동에 대해 적극적인 가해행위뿐만 아니라 소극적 의미의 단순 체벌 및 훈육까지 아동학대의 정의에 명확히 포함하고 있음이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사랑의 매’, ‘귀한 자식에게는 매를 아끼지 않는다’라는 말로 부모의 체벌이 자녀 훈육의 방편으로 인식되어 왔던 우리나라 정서상, 그동안 자신도 그렇게 자라왔고, 여전히 익숙한 그 행위를 법적으로 판단하자 반발이 거셌고, 수용하기 힘든 모양새이기도 하다. 

 

 

이제 아무것도 안 할 거예요. 교육도 안시키고 관심 끄면 되잖아요
다음 단계는 보통 “이제 아무것도 안 할 거예요. 교육도 안시키고 관심 끄고 있으면 되잖아요”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자식을 가르치는 방법에 체벌 이외의 방법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해서 슬프기도 하고 난감하기도 하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우리 교법에는 사람의 일생에 기초가 되는 태중의 기간부터 나고 자라는 여러 기간을 통해 태교, 유교, 통교의 모든 도가 잘 베풀어져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특히 유교에서는 심교와 행교, 언교로써 자녀로 하여금 저절로 그 실행을 체 받게 하는 것을 강조했고, 엄교는 철없는 때에 부득이 위엄으로 가르치는 법이니 이는 자주 쓸 법은 아니라 하셨다. 


그런데 엄교를 금한다고 하여 자녀 훈육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부모 스스로가 행하여 자녀로 하여금 체 받게 해야 하는 나머지 교육방법을 스스로 실행하지 못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학대와 훈육의 차이는 뭔가요
학대 행위자가 된 내담자는 자식을 키우느라 애쓴 노력에 배반당한 분노감, TV에 나오는 행위자와 동급 인간이 된 것 같은 모멸감 등을 쏟아낸다. 그러고 나면, 마침내 도대체 어디서 뭐가 잘못됐는지 물어보는 단계로 넘어가 비로소 내담자의 내면 세계를 탐색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조금씩 자신에 대해 알아차림을 시작하는데, 알아차림이 힘든 내담자에는 인지상담의 형식을 적용하기도 한다. 원래 고요했던 내 마음이 경계를 만나 일어나는 감정을 찾고, 그 순간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사고를 찾아보고 나아가 그동안 경험과 학습에 의해 내 마음 깊이 형성된 핵심감정인 주착심을 찾는다. 


가난한 가정경제와 많은 형제 속에서 자란 나의 내담자는 자신만 양보를 강요받아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슬픔, 결국 형제들 중 자신만 낮은 학력이라는 열등감이 내면에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공부하라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경계를 만나자, 화가 나고 ‘자신을 무시한다’고 사고하며 강한 체벌이 반복됐던 것을 알게 됐다. 이때 자신의 행동이 정말 자녀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한 훈육이었는가에 대해 질문함으로써 그 답을 찾으며, 자녀에 대한 미안함이 싹트며 학대에 대한 인식이 생겨났다.  


때로는 그래도 학대가 아니고 잘 키우려고 하는 훈육이었다고 고집하는 경우, 그렇다면 왜 자녀는 가정을 멀리하고, 자해를 서슴지 않고, 우울한 모습으로 학업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의욕을 잃고 있거나, 반대로 학교에서 학교 폭력이나 비행을 서슴지 않고 있는지, 정말 내 아이가 잘 자라고 있는 건지 의문을 던진다. 언젠가는 “내가 그렇게 맞을 땐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잖아요!”라고 항변이 돌아오기도 했는데, 그땐 자식이기에 맞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어린 내담자의 상처받은 마음에 공감하고, 힘들게 버텨왔던 시간들에 대해 애도함으로써 내면의 분노를 풀어내고 학대로 인한 상처감을 어루만지며 학대가 되물림되지 않도록 했다. 


부모는 훈육이었다고 하는 학대 행동에 자녀는 어쩔 줄 모르다가 기괴한 행동을 시작한 경우도 있다. 부모는 아이가 미친 것 같다고, 억지로 정신과로 데리고 가려 하자 자녀의 기괴한 행동은 더욱 심해졌고 감당하지 못한 부모의 학대는 더 심해졌다. 알고 보니, 자녀는 눈물 흘리며, “부모를 때릴 순 없잖아요”라고 하며 그 기괴한 행동이 부모로 인한 상처감과 분노를 해소하는 자기만의 방편이었음을 고백했다. 부모가 부모의 도를 다하지 못함에도 자녀는 자녀의 도를 다하려 애쓰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부모도 깜짝 놀라며 눈물을 흘리며 여기까지 와서야 서로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됐고, 그 자리에 있는 나 역시 부모로서 흠칫하며 내 행동을 돌아보던 날이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자신의 훈육방법 개선에 대해 인식한 후에는 행동상담을 활용한다. 자신의 고요한 마음을 흩트리는 경계를 느낄 때마다 알아차리고 멈추기를 먼저 연습하고 이를 상시일기를 쓰듯 매일매일 기록하고, 다음 만남에 함께 점검한다. 경계를 알아차리기와 멈추기가 연습이 되면 원래 마음을 찾았을 때 비로소 진정한 훈육이 가능해지고 그 가르침이 자녀에게 전달되고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 부모의 이러한 변화를 위한 노력이 ‘행교’로써, 자녀로 하여금 자연스레 ‘체 받게’ 될 수 있으며 부모자녀 관계가 개선되고, 점차 갈등 상황에서도 서로의 대응방법이 달라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원래 마음을 찾고 나서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책상을 닦으며 주절주절 읊조린다. “심지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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