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광 명예교수
김혜광 명예교수

[원불교신문=김혜광 명예교수] 일반적으로 평등이란 신분, 재산, 성별, 노소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가치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사실 평등 자체의 의미는 이념이나 관점에 따라 다양성을 넘어 상대성을 시사한다. 우리에게 가장 보편화한 평등으로는 인간으로서 누구나 같게 대해야 한다는 것(동일성)이다.

그러나 이런 접근은 인간의 다양한 차이를 간과한 채 획일화하기 쉽다는 한계 때문에 적합하냐 혹은 공정 하느냐로 보아야 한다(공정성)는 대안도 있다. 같으면 같이 다르면 다르게 대해야 한다는 논리다. 나아가 교육평등은 시공간적 차이에 따라 달라질 소지마저 있다. 심지어 교육의 기회균등마저도 과정 및 결과의 평등과의 균형을 잃게 되면 본래 의미가 퇴색될 수도 있다. 그럴 뿐만 아니라 교육 불평등의 원인을 개인 또는 사회 구조적인 요인 어디에서 찾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원불교 교리 가운데 사요는 궁극적으로 평등세계를 지향한다. 따라서 타자녀 교육은 교육평등을 지향한다고 본다. 원불교 교리 가운데 평등과 아울러 구별 혹은 차별세계를 제시한 사례도 있다. 정전에서 인간의 성품은 선악 귀천의 차별이 끊어진 절대적으로 평등하다고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소유무, 유상과 무상, 변과 불변, 인과보응 등 차별이 엄연한 양면의 세계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차별은 둘 이상의 대상을 차이를 둬 구별하는 것으로 정전 지자본위에서 불합리한 차별의 요인으로 반상, 적서, 노소, 남녀, 종족을 들고 있다. 문화권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이런 구조적인 문제가 교육의 평등을 저해한다는 지적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합리적 차별도 존재하는가. 그것은 오히려 구별이나 변별로 보는 것이 온당하다. 지우의 차별이 대표적이다. 다름과 차이가 그렇듯 차이와 차별은 다르다. 차이로 인하여 차별이 정당화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남녀노소, 피부색 등은 구별이나 차이일 뿐 차별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잘 배우고 잘 가르치려면 배움과 가르침의 대상이 어떤 사회, 경제적 지위에 있든 남녀, 노소, 피부색을 넘어서서 이뤄져야 함을 적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교육의 기회균등을 저해하는 구조적 문제 해소가 곧바로 교육평등을 보장해준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러한 구조적 문제 해결이 교육평등을 위한 필요조건은 될지언정 충분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육평등을 지향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노력은 물론 사회 구조적인 문제의 해결뿐만 아니라 과정과 결과의 평등을 어느 정도 담지해주느냐가 중요한 요인으로 보인다. 그리고 현실 세계에서 교육평등은 절대적이라기보다는 상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지금은 교육기회 균등(교육평등)이 보장됐다 할지라도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면 전혀 다르게 이해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원불교 교리에서 낙원세계, 사요에서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평등세계는 인류가 공유해야 할 가치이자 궁극적인 목표로 받아들인다. 

다만, 이를 현실 속에서 구현하는 데는 오히려 어느 것이 보다 평등에 근접하느냐이지 언제 어디서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평등세계를 찾기란 결코 쉽지 않다. 요컨대 교육평등은 교육기관에 접근기회의 평등만이 아니라 과정과 결과의 평등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원광대학교

[2021년 11월 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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