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타원 진문철 원로교무
밀타원 진문철 원로교무

[원불교신문=류현진 기자] 지난 11월 6일 대봉도 법훈을 수여받은 밀타원 진문철 원로교무(密陀圓 陳文徹·76세). 원기55년 출가 후 ‘나보다 타인을 먼저 배려하는 마음으로 살자’는 공부표준으로 밀양·창녕·인천·임피·여수·모스크바·전농·교동·백운교당 등 가는 곳마다 교화하는 재미로 살아온 그. 퇴임 후에는 모스크바 교당에 도움의 손길을 전하는 보람으로 지내왔다. 그는 창녕교당, 인천교당, 여수교당 등을 신축하고 인재양성에도 힘써 9명의 전무출신을 배출했다.

보람된 삶을 찾아 출가의 길로
전북 정읍이 고향인 진문철 원로교무는 외사촌 언니를 따라 한문 공부를 하러 화해교당에 다니며 원기45년 자연스럽게 입교하게 됐다. 교당 청년회를 다니며 야학 공부를 하던 중 교당 공양주 언니가 영산으로 공부하러 간다기에, 20대 초반인 그는 원기50년 요산 김달성 교무의 추천으로 출가를 지원하고 영산으로 함께 공부길을 떠났다. “아무런 의미도 없고 보람도 없는 일상이 하루하루 반복되는 것이 싫었어. 앞으로도 이런 삶이 계속될 것 같아서 출가를 결심했어.”

영산에서 출납사무를 보며 간사를 하는 등 어렵게 공부를 마친 진 원로교무는 밀양교당에 부교무로 첫 발령을 받는다. 수타원 이순석 주임교무와 격 없는 생활로 부모님처럼 모시고 살며 신축 불사를 도왔다. 첫 발령지에서 신축 불사를 한 경험이 씨앗이 되어 그는 이후 여러 교당을 신축한다.

창녕교당 개척, 신축봉불
밀양에서 4년간 근무한 그는 창녕교당을 개척한다. “월세를 얻어 처마 밑에서 밥해 먹고, 다락에다 법신불을 모시고 법회는 마루에서 봤어. 작은 방인데도 교화가 참 잘 됐어. 당시는 어디든 다 교화가 잘 되던 시절이야.” 그는 원불교를 홍보하기 위해 ‘불조심 강조기간’, ‘원호의 달’ 등 각종 공익문구에 ‘원불교 창녕교당’을 넣어 터미널 앞에 현수막을 걸었다. 군에서 체육대회를 하면 교도들과 보리차를 끓여서 음료수를 제공하고, 관등 행사가 끝나면 적은 금액이라도 군청에 방위성금을 위탁했다. 진 원로교무는 군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지역사회에 원불교의 위상을 높였다. 

창녕은 전국에서 양파가 제일 많이 나오는 곳으로 동네마다 양파 작업을 나가면 아이들이 갈 곳이 없었다. 그 당시만 해도 탁아소가 없을 때였다. “엄마들이 작업을 하니까 아이들이 모두 논둑에 있었어. 교도 2명하고 같이 땡볕에 앉아서 우는 아이들을 마을회관에 데려와 간식과 장난감 등을 준비해서 하루종일 같이 놀면서 돌봐줬어.” 다음 해에는 2팀으로 나눠서 농번기 때 아이들 40~50명을 교도들과 함께 보살폈다. 그는 농번기 탁아소 봉사 공로를 인정받아 경남도지사상, 창녕읍장상을 수상했다.

지역 요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덕에 그는 정보를 얻어 사방관리소(구 산림청)로 사용했던 토지와 건물을 경남도청으로부터 불하받아 수리해 봉불식을 한다. 7년 뒤에는 노후된 건물을 헐고 90평 신축 건물을 지어 봉불식을 거행했다. “11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게 재미있게 살았어.” 과거를 회상하는 그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꽃 핀다.

인천교당, 교화단으로 법풍 일으켜 
창녕에 이어 인천교당에 부임해 320평 교당건물을 신축한 그는 교화단 활동을 통해 공부 열기를 부흥시킨다. 교전쓰기, 상시일기, 법회출석 등 3관왕이 많이 나온 단에 시상하며, 단원들끼리 서로 공부를 독려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법회출석은 일 년에 2번까지 연고를 둬서 기회를 주고, 독경도 밥하다, 빨래하다가도 몇 번만 챙겨서 할 수 있도록, 심고도 꼭 격식을 갖추지 못해도 누워서 잠깐이라도 마음을 모아서 할 수 있도록 초입자들이 조금씩 공부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게 지도했다. 덕분에 연말이면 30~40명씩 3관왕 수상자들이 탄생했다. 매달 진행되는 단장 중앙 회의 때면, 각 단의 현황을 공유하며 교화와 공부 아이디어를 나눴다. “연초에 단장·중앙 훈련을 하며 기도로 마음을 모으고, 공부계획과 사업계획을 공유해. 8월이 되면 다시 단장·중앙 훈련을 해서 느슨해진 마음을 다시 묶었지. 교도들이 참 잘 따라줘서 고마워. 그때 참 재미있게 공부했었어.” 

대각개교절 초청 법회 때도 단별로 초대 경쟁이 붙어 300~400명이 함께하는 풍성한 법회를 보는 등 당시 인천교당은 공부와 교화 열기가 대단했었다. 

여수교당 신축, 문화교실 열어
그가 여수교당에 부임한 지 1년이 지나 건물이 노후화돼 비가 샜다. 진 원로교무는 신축 계획을 세워 350평의 멋진 교당을 봉불하고 문화교실을 운영한다. “지금은 동사무소 등 문화교실을 운영하는 곳이 많은데 그 당시는 없던 때야. 여수교당이 공간이 큰데 일요일 한번 법회를 보고 제대로 활용이 안 돼서 안타까웠어. 그래서 주중에 시민들을 대상으로 창, 민요, 댄스, 요가 등 문화교실을 열었어. 교당이 항상 사람들로 북적였지.” 재능기부로 진행된 문화교실 덕분에 여수시민들에게 원불교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심고, 교화로까지 이어져 일거양득이었다. 

당시 소록도에 들어가는데 배가 끊어지면 녹동에서 잠을 자고 가야 하는 실정이었다. 당시 소록도교당 교무의 힘든 사정을 전해들은 진 원로교무는 여수교당 임기가 끝나기 전 녹동에 연원교당을 내어 봉불식을 마친다. 그가 전주 교동교당에 부임했을 때는 한옥을 개축 및 신축하고, 민박운영을 하며 교화를 활성화시켰다.
 

밀타원 진문철 원로교무
밀타원 진문철 원로교무

모스크바에 도움의 손길 전해
진 원로교무는 여수교당 임기를 마치고 러시아 모스크바교당으로 발령을 받는다. 예상치 못했던 발령에 그는 자신의 자리가 아닌 것 같아 3년 근무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전농교당, 교동교당, 백운교당에서 교화에 힘쓰다 원기98년 퇴임한다. “6년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한국으로 나왔던 죄책감에 근무하며 일 년에 한 번씩 민속잔치의 물품을 구입해서 모스크바에 도우러 다녔어.” 

퇴임 후 그는 모스크바교당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등,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전까지 여름에는 민속잔치 물품 준비를 돕고, 겨울에는 재료를 마련해 김장을 도와주러 15년 넘게 러시아를 왕래하며 도움의 손길을 전했다. 그는 모스크바에 가면 식당일을 도맡아 현장 교무들이 세종학당 운영과 교화에 주력할 수 있게 도왔다. “한국어 학당이라 러시아 학생들이 다 한국말을 잘해. 가면 엄마를 본 것처럼 반겨주고 좋아해 줘 행복하지. 식당일을 하는데 그렇게 마음이 편안할 수 없었어. 교화현장에서 근무할 때는 책임감으로 긴장하며 살아오다, 퇴임 후 편안한 마음으로 일하며 보람을 많이 느꼈어. 또 좌선, 염불, 회화, 경전공부 등 모스크바교당에서 매일 진행되는 모임공부로 지혜를 단련하면서 지내왔던 수양시간들이 지금 수도원에서의 생활에도 많은 힘이 된 것 같아.” 

스승님의 말씀을 실천으로
많은 일을 이뤄온 그이지만 “우리 때는 다 이렇게 하고 살았어. 그렇게 안 하고 산 사람이 어디 있겠냐”며 끝내 겸손한 말을 전하는 진 원로교무. 부임지마다 추억을 되새기는 그에게서 연신 “그때 참 재미있었다”라는 말이 반복된다. 한평생을 돌아보며 저렇게 교화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면, 참 행복한 교역자의 삶이 아닐까.

이제서야 서원이 더 확실해 졌다는 그는 실천공부에 더욱 힘쓰겠다고 했다. “천도법문 마지막에 ‘어느 세월에 또다시 사람의 몸을 받아 성현의 회상을 찾아 대업을 성취하고 무량한 혜복을 얻으리요’라는 말씀이 요즘 더욱 실감이 나. 이번 생에 이만큼이라도 인연을 걸어 놨는데 다음 생에 다시 와 이 인연을 이어가야 하는데 정신이 바짝 차려져. 40~50년을 입으로 좋은 소리만 하다 보니까 마치 다 행동한 사람처럼 완성됐다고 착각할 때가 많아. 입으로 품었던 것을 실제로 실천하고, 모든 것을 더욱 까닭 있게 공부하려고 노력하고 있어.”

[2021년 12월 0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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