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대성 교무
박대성 교무

[원불교신문=박대성 교무]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엉덩이로 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단, 오분이라도 방석에 앉는 것이 바로 좌선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관문이 된다.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이 지속적이고 끈질긴 적공을 놓치게 된다면 마음의 자유를 얻을 기약은 점점 멀어지게 된다.

예비교무 시절 한창 참선에 재미가 나서 방학 때도 선을 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정진을 하는데 한나절이 지나니까 가부좌를 틀은 다리가 어찌나 아픈지 끊어져 나갈 것 같았다. 

이를 악물며 참고 있는데 나중에는 온몸이 떨려 어금니가 딱딱 부딪힐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그러다 순간 ‘이러다가 다리를 못 쓰게 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덜컥 들었다. 단순한 걱정이 아니라 공포였다. 마구니의 시험(魔障)이 시작된 것이다.

마음공부가 익어 가면 몇 가지 경계가 나타나는데 그중 하나가 극단적인 ‘공포’이다. 에고(ego·我相)의 입장에서 깨달음을 통해 자아가 해체된다면 그것만큼 충격적이고 무서운 사건은 없기 때문이다.

석가 세존이 6년 수행 중에 쾌락과 금욕의 양극단에 도가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극단적인 고행(苦行) 대신에 중도(中道)에 바탕한 선정에 들게 되자 천상 세계에 자리 잡은 마왕의 궁전이 흔들려 박살 나기 직전이 됐다고 불경에 기록돼 있다. 이것은 마음이 밝아지면 저절로 자아가 무너진다는 심리학적 사실에 대한 비유로 읽을 수 있다.

좌선 중에 극심한 공포가 몰려와서 스승에게 상의를 했더니 웃으며 “역대 도인 중에 좌선(坐禪)하다가 다리 불구 된 사람 없는데 네가 처음이 된다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냐”라고 답을 줬다. 그 말을 듣자마자 거짓말처럼 통증이 사라졌다. 이후에는 다리도 포기했는지 공포에 바탕한 통증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항상 극단적인 방식으로 아픔을 이겨낼 필요는 없지만 흔들리는 몸과 마음을 일정한 수준에 올려놓기 위해서는 극기(克己)의 정진이 필요하다. 인내(忍耐)는 한 번에 되지 않고, 서둘러서는 성취하지 못한다. 급하다고 실을 바늘허리에 매어 쓸 수 없다. 바늘귀를 바라보며 숨을 가다듬고 정신을 집중해 실을 꿰는 그 순간은 바로 여유에서 시작된다.

선을 처음 시작하던 초심자 시절, 필자는 누구보다 성질이 급한 사람이었다. 도(道)가 속히 완성되기를 바라는 낮도깨비 같은 면이 있어 몸살을 하던 시간이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공부의 성취는 밀어붙일 때가 아니라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경계를 넘겼을 때 나타났다. 공부의 결과는 법신불에게 맡기고 여러분은 그저 한 걸음 한 걸음 인내의 발걸음을 쉬지 않기를 당부한다.

/원불교대학원대학교

[2021년 12월 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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