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수 마음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
이은수 마음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

[원불교신문=이은수 연구교수] 2020년 3월 11일, 세계보건기구는 코로나19에 대해 팬데믹을 선언했다. 대다수가 면역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혼란과 불안을 야기하는 동시에 생활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학교 가는 학생, 출근하는 직장인, 명절에 만나는 친척, 마주 앉아 식사하고 삶을 나누는 등 자연스럽게 여겨졌던 일상의 장면들이 사라졌었다. 방역지침이 낯설고 불편해도 모두가 안전하게 이전과 같은 일상을 회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개인 방역에 충실했으나 완전히 종식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제 우리는 예상할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일지는 알 수 없으나, 또 다른 이름의 코로나19 발생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동안 우리는 다양한 상황과 감정을 만나게 됐다. 뜻하지 않게 만난 큰 어려움이 각자의 환경과 상황이나 역할에 따라 더 힘겨웠던 사람도 덜 힘들었던 사람도 있겠으나, 누군가가 아프고 세상을 떠나고 마음 졸이며 가족의 안전을 확인하는 동안, 홀로 편안하기만 했던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삶에서 심리적 고통은 불가피
아직 끝나지 않은, 여전히 코로나와 함께하는 시간은 어쩌면 그저 우리 삶의 한 모습인지도 모른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즈음, 지난해를 돌아보고 새해를 맞이하며 찾아야 할 것은 무엇이고 놓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심리적 고통(pain)은 우리 삶에서 불가피한 부분이다. 죽은 아들을 품에 안고 견딜 수 없는 슬픔으로 애원하는 여인에게 부처님은 사람이 한 번도 죽어 나간 적이 없는 집에서 겨자씨 한 줌을 얻어오라고 했다. 아무리 찾아도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의 겨자씨를 구할 수 없던 여인은 품 안의 아이를 가만히 내려놓고 부처님 아래서 한참을 울었다고 한다. 고통은 자연의 한 부분이자 삶의 불가피한 부분이다. 때로는 삶의 의미를 위해 고통을 선택하거나 감수하기도 한다. 그러나 괴로움(suffer)은 다르다.

괴로움은 고통에 대한, 혹은 고통으로 인한 고뇌와 분노, 후회로 일어난다. 원하지 않는 고통을 수용하겠노라 다짐한다고 수용이 되는 것은 아니다. 수용은 우리 내면에서 순간순간 일어나는 모든 감정과 생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이는 그래도 괜찮다거나 그럴 수 있다고 용인하는 것과는 다르다. 하늘은 하늘로, 바다는 바다로, 판단과 평가에 앞서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를 지켜줄 수 있는 수호자인 나 자신
혹 주위에 내 생각과 감정을 하나하나 평가하고 왜 그러냐며 다그치는 사람이 있는가. 과거를 들추어 비난하고, 미래를 끌어와 협박하고, 완벽의 잣대로 냉소와 비난을 앞세우는 그 사람과 필자는 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 또는 이처럼 노골적으로 굴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힘들고 지친 나의 몸과 마음을 모르는 척하며 나의 필요를 무시하는 사람이 있는가. 있다면 마찬가지로 관계를 지속하기는 어렵겠다. 

이와 같은 비수용과 정서적 단절의 상태는 타인과의 관계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자비와 사랑이 없는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자기 마음의 소리를 가장 많이 듣고 있는 나 자신은 어떠한 자비도 사랑도 없이 무반응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자. 

자신에게 가장 많은 평가와 지시를 내리는 단골 심판관은 분명 자신이다. 마찬가지로 언제 어디서나 가장 빠른 위로와 격려로 나를 지켜줄 수 있는 수호자 또한 자신이다. 
 

감정·생각 일어나는 자신을 돌보기
2021년 한 해 동안, 길었던 코로나19 상황 동안, 그리고 길게는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어쩔 수 없는 고통을 마주할 때마다 우리는 나름의 방식으로 무던히 애를 썼다. 피할 수 없는 고통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를 받아들이면서도 따라붙는 감정과 생각에 다시 괴로워지기도 했다. 이제 해야 하는 일은 그런 나 자신을 돌보는 일이다. 감정과 생각이 일어나고 있는 자신을 수용하는 것이다. 고통스러워하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미움은 받아들였으나 미움으로 인해 괴로움을 경험하는 나를 수용하고, 실패를 인정했으나 실패에 못내 괴로운 나를 수용하는 것이다. 경험을 수용하는 것을 넘어서 경험하고 있는 자신을 돌보는 것이다.

“내가 뭘 잘못했지?”, “나는 왜 부족하지?”, “다음에는 더 잘해야지.” 우리는 때때로 타인보다 자신을 더 엄격하게 몰아세우며 자신에게 절실한 필요와 욕구를 외면한다. 타인을 지키고 보살피면서도 자신을 보호하고 돌보는 것은 어려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삶을 살아가며 고통스러운 경험을 할 때 고통을 경험하고 있는 당사자인 나 자신에게 친절한 마음을 갖고 돌보는 것이 필요하다. 

나에게 스스로 좋은 사람 되기
크리스토퍼 거머 박사와 크리스틴 네프 박사는 자기연민-마음챙김(MSC)을 개발하고 세 가지 핵심요소로 설명하고 있다(자기연민을 뜻하는 ‘컴페션(compassin)’은 ‘함께 아파한다’는 어원을 가지고 있는데, 동정이나 나약함이 아닌 자비심과 친절함을 의미한다). 첫째는 인간 경험의 보편성에 대한 이해이다. 자신이 스스로 부족하고 실패했다고 느낄 때 그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경험이며 나 또한 단지 한 명의 인간임을 아는 것이다. 둘째는 자기 친절로, 고통 속에 있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자신에게 친절하게 제공하는 것이 뜻한다. 셋째는, 마음챙김이다. 경험하는 동안 경험하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마음챙김이라고 명상전문가 가이 암스트롱은 설명한다. 자비와 친절에 바탕한 마음챙김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을 위협으로 지각하고 방어체계를 갖추는 대신 돌봄체계로 전환해 안전과 안정을 느끼게 한다.

사실 자기돌봄과 마음챙김은 우리에게 낯설고 새로운 작업이 아니다. 개인마다 이미 잘 해나가고 있는 부분이 있다. 반면, 온기가 전혀 닿지 않은 미지의 영역 또한 있을 수 있다. 자기비판이 아닌 자기친절로, 저항과 고립이 아닌 자기수용으로, 마음놓침이 아닌 마음챙김의 순간들로 이어진다면, 우리의 삶은 보다 부드럽고 따뜻하며 풍요로울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의식적으로 자기를 돌보고 의식적으로 여유를 가져야 한다.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매일 밥을 챙기듯, 자신을 향한 자비와 사랑을 훈련해야 한다. 타인에게 좋은 사람인 것도 좋겠으나, 나에게 스스로 좋은 사람인지 반조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만일 스스로에게 친절하게 대하지 않는다면, 타인에게도 자비를 실천할 수 없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이제는 정말 나에게 친절할 시간이다. 그러니 지금 바로 시작해보자. 한 해 동안 애쓰면서도 내 마음 같지 않은 일들에 때로는 힘들었던 자신을 위해 기도하자. 남에게만 좋은 사람이 아닌 나에게도 친절하고 좋은 사람으로 깊은 사랑으로 서로 연결된 수많은 ‘나’와 ‘당신’들을 위해서 기도하자.

“당신이 편안하기를, 당신이 평화롭기를 나는 기도합니다.”

이은수 마음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
ㆍ숙명여자대학교 석·박사 (아동심리치료전공)
ㆍ아동·청소년 심리상담전문가, 임상심리사

[2021년 12월 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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