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상 유린교당 교도
박인상 유린교당 교도

[원불교신문=권원준 기자] 지난 5년, 의정부시 용현동에 자리한 후정원을 내 집처럼 알뜰히 가꾸며 무상보시의 공덕을 쌓은 박인상 교도(炫山 朴仁相·58·유린교당). 교단은 11월 5일 열린 교역자대회에서 그의 특별한 공적을 높이사 인도실천상을 수여했다.

무아봉공으로 일궈낸 후정원
수락산 자락에 자리한 후정원. 얼마 전까지만 해도 관리가 쉽지 않은 곳이었다. 장기간 임대를 거치며 임차인들이 묵혀놓은 쓰레기와 잡목이 주를 이뤘기 때문이다. 그러던 5년 전 박 교도가 친구의 소개로 재정산업부와 인연이 돼 이곳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첫 3년은 상주하며 오로지 이곳 일에만 전념했다. 특히 2년간은 그가 운영하는 회사에서 가져온 굴착기로 매일 땅을 파며 쓰레기 치우는 일에 몰두했다. 이후 길을 내고 낡아 쓸 수 없는 건물들을 고치며 도량정비를 이었다. 

그는 일속에서 큰일들이 자연스레 해결된 일이 많았다며 그 사례를 들려줬다. 가장 큰 일은 쓰레기 처리였다. 쓰레기를 치우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을 터. “그때 인근의 한 공사업체가 공사하면서 버려지는 콘크리트 모을 곳을 찾고 있었죠. 그때 저희에게 땅을 쓸 수 있게 해달라 요청했고 저희는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그 인연으로 그 업체가 모아놓은 콘크리트를 버릴 때 이곳의 쓰레기를 함께 처리해 줬다. 또 하나의 해결과제가 정화조 공사였다. 이 업체의 정체는 시에서 시행하는 정화조 공사업체. “공사할 때 이곳도 함께 해달라는 요청을 했습니다.

제가 이곳에 와 처음 한 작업이 정화조 청소였는데 그만큼 시급한 작업이었죠.” 시에 정화조 공사 신청을 해놓은 상태였지만 언제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정화조 청소와 정화조 공사 신청 이력이 남아있었기에 이를 근거해 이 업체를 통해 정화조 공사까지 마칠 수 있게 됐다. 이번엔 매립된 쓰레기를 퍼 올리고 낮아진 지대를 메우고 평탄화하는 작업이 남아있었다. 이곳을 메우기 위해선 엄청난 흙이 필요했을 터. “때마침 길 건너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퍼낸 흙을 이곳에 준다는 것이었어요. 흙 상태도 좋아 마다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덤프트럭 수백여 대가 흙을 날라줘 평탄화 할 수 있게 됐죠.” 또 저온 창고가 필요할 때 저온 창고 2동을 희사받기도 했고 공사자재가 필요할 땐 자재를 희사받기도 하며 어려운 일들을 뚝딱 해결해 나갔다.

생활표준은 무운만리천
이 모든 과정을 이루기 위해 정성을 다한 그였지만 이곳에서 자신이 한 일은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그가 얼마나 상없이 이 일에 임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가 이곳에 오며 표준으로 삼은 법문이 있다. 당시 경산종법사가 내려준 ‘무운만리천(無雲萬里天)’이란 법문이다. “처음엔 ‘상없이 일을 행해라’는 뜻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법문을 곱씹을수록 어마 어마한 말씀인 걸 알게 됐죠. 손바닥만 한 하늘에도 먹구름이 끼는데 4000㎞나 되는 만리, 그 넓은 하늘을 어떻게 구름 한 점 없이 할까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일할 때마다 의두로 삼고 연마하기 시작했죠. 그러던 어느 날 ‘내 안에 구름이 없으면 어딜가든 구름이 없겠구나, 나 스스로가 깨끗하면 천리든 만리든 다 깨끗하겠구나’라는 감상을 얻게 됐습니다.” 일하며 상이 생기면 다시금 그 법문을 챙기고 또 챙겼다. “지금도 상을 받고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이야기하니 정말 내가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럴 때마다 다시금 이 법문을 새깁니다.” 

케냐 학교사업 지원
유린교당을 다니며 여성회와 깊은 인연을 맺은 그는 아프리카 케냐의 학교지원사업에도 동참했다. 당시 여성회에선 한울안 NGO 사업을 전개 중이었고 그 사업의 하나로 학교를 지원하고 있었다. “지원하는 곳이 기술학교였는데, 제 전공이 전기다 보니 조금이나마 도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첫 방문 때 모니터링을 하며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꼼꼼히 챙겼다.

그리고 두 번째 방문부턴 본격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뻗었다. 자재를 가지고 가 학생들이 실습을 할 수 있도록 도왔고, 교당 터가 마련됐을 땐 현장 기초작업에 참여했다. 세 번째 방문 땐 공사가 진행 중이던 교당 상하수도 배관공사를 하며 케냐 교당 건설에 힘을 실었다. “케냐에서 원불교가 정식법인으로 등록되고 재봉, 가발 등만 가르치던 기술학교가 전기, 건축, 요리, 컴퓨터, 자동차 등 다양한 항목을 가르치는 종합기술학교로 발전돼 뿌듯합니다.” 그렇게 그의 손길이 필요한 곳은 어디든 달려가 합력하고 있었다.

원불교와의 인연
원기67년 친구인 양성천 교무(시드니교당)의 소개로 총부에 온 것이 원불교와의 인연이다. 총부에 가면 학원에 다니며 공부 할 수 있다는 말에 곧장 총부에서 간사근무를 시작했다. “총부에 가자마자 송대에서 성산법사님과 형산법사님을 모시고 근무하게 됐습니다. 아무 준비도 없이, 그리고 전무출신을 하러 간 것도 아닌데 2년 가까이 간사근무를 했죠. 이곳이 별천지란 생각에서 였습니다.” 그 당시 총부 안과 밖의 공기가 다르게 느껴질 정도로 총부가 좋았다 말하는 그. “저는 성산법사님을 모시고 잤습니다.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학생들이 성탑 참배를 하고 송대 앞에서 성산법사님 법문을 받드는데 제가 안에 있으면서 그 법문을 들었죠. 아마 그때의 그 법문말씀이 지금 제 마음의 힘을 쌓을 수 있도록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간사 이후 그가 원불교를 다시 찾았을 때는 결혼을 하고 한창 사회생활을 하던 무렵이다. 길을 가다 우연히 유린교당을 만나며 교단과의 인연을 잇게 된 것이다. “길을 가는데 유린선교소 간판이 보였어요. 이곳에 원불교가 있는 것을 알게 됐고, 신정절에 아내와 함께 교당을 찾게 됐죠.” 그 한 번의 내왕이 찐 교도가 되는 계기가 됐다. “처음 신정절 행사에 갔는데 저와 아내를 포함해 교도가 4명뿐이었어요. 교무님이 저희를 알뜰하게 챙기셨죠. 당시 순교감이셨던 좌산상사님이 교당을 찾으셨을 때 한번 출석한 제 가족을 불러 인사시켜주실 정도였으니깐요.” 그는 그때부터 유린역사의 초창기 역사를 함께하기 시작했다. 어린이집, 복지관을 일구고 교도회장으로서 교당을 신축하는 데 일조했다. 또 교도들과 함께 육군사관학교 교화에도 정성을 들이며 초창기 군교화의 조력자가 됐다.

“아침저녁 아궁이에 불을 때다 보면 안쪽에는 큰 나무를 넣고 바깥쪽에는 잔가지를 넣고 불쏘시개로 불을 붙입니다.” 그는 후정원에서 자신의 역할을 불쏘시개로 비유했다. “이곳 일은 끝이 없습니다. 불쏘시개가 끊임없이 열기를 불어 넣어야 큰 나무들이 꺼지지 않고 탈 수 있죠. 3년 동안의 특별자원봉사 임기가 끝났지만, 누군가 이곳에서 꽃을 피울 때까지 저는 불쏘시개의 역할을 하며 꾸준하게 돕고 싶습니다.” 

[2021년 12월 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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