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은 교무
임진은 교무

[원불교신문=임진은 교무] 만약 누군가가 “나는 지금 0000000000을 하고 싶어요.”라는 문장의 빈 칸을 채워보라고 요청한다면 어떨까? 그것도 적어도 5개의 문장을 채워보라고 한다면, 그래서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보도록 한다면, 과연 쉽게 답할 수 있을까? 

자신의 욕구, 즉 자신이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차리는 것은 삶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이에 부합하는 구체적인 활동을 선택하고 실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원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행동의 목표와 방향성을 잃게 되어 결국 혼란에 빠지고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긴다. 비유하면, 목적지를 모르는 상태로 복잡한 도로 위를 달리는 것과 같다. 

안타깝게도,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잘 모른 채 살아간다고 한다. 주로 성장 과정에서 자신의 욕구를 자각하고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인 반응을 받았던 경험 때문인데, 그 결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안으로 억누른 채 도덕적인 기준이나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따라 행동하는 것에 길들여지게 된다. 그럴수록 자신의 진정한 욕구를 자각하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겉으로는 상당히 착실하고 모범적인 생활을 하는 듯 보이지만, 욕구에 대한 지각이 낮은 만큼 자신이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을 얻는 쪽으로 행동하기가 어렵고, 따라서 내적으로는 공허한 느낌과 우울감을 갖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감정적인 단어보다는 인지적이고 개념적인 단어들을 주로 사용하고, ‘~해야 한다’는 식의 당위적인 표현도 많이 쓴다. 

혹시라도 이런 측면을 갖고 있다면, 스스로의 욕구를 알아차릴 수 있는 민감성을 기르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욕구를 자각하는 것에 대해서 마음 한편에 두려움이나 죄책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자체가 당혹스럽게 느껴지고 거부감이 들기도 한다. 

욕구를 알아차리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반드시 ‘지금-여기’에서 느껴지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막연하고 추상적인 바람보다는 지금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느끼고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자연히 “혹시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이 상황에 대해 좀 더 설명하고 싶어요.” “저도 그 일에 참여하고 싶어요.”와 같은 명확한 의사전달이 가능해진다. 그만큼 해결도 가까워진다.

예비교무 시절,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매우 잘 표현하는 도반과 같은 방을 쓴 적이 있다. 처음에는 나와는 다른 그 모습이 무척이나 낯설고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도반의 모습은 오히려 경직된 나를 비쳐주는 좋은 거울이 됐다. 민감성을 깨우기 위한 스스로의 노력과 더불어, 그 부분에 나보다 능한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 역시 알아차림을 높이는데 무척 효과적이다.

 /원광대학교

[2021년 12월 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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