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현 교무
김도현 교무

[원불교신문=김도현 교무] 불경은 ‘여시아문’으로 시작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활동한 2500여 년 전에는 종이가 귀해 법문을 구전으로 전할 수밖에 없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열반 후, 부처님의 말씀이 결집된다. 마하가섭의 주도로 제자들이 모여 부처님 말씀을 모으고 선별한 것이다. 한 제자가 자신이 들었던 법문을 대중 앞에서 이야기한다. 대중이 듣고 이 말씀이 부처님의 말씀이 맞다고 동의하면, 부처님의 법문으로 인정됐다. 그러면 대중이 다 함께 암송하면서 이 법문이 구전됐다고 한다. 이렇게 정리된 법문이 노래처럼 암송되면서 구전됐다가 후대에 문자로 기록됐다. 그래서 불경의 시작에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는 뜻의 ‘여시아문’이 들어간다.

소태산 대종사는 ‘일원은 언어도단의 입정처’라고 해, 일원의 진리를 언어로 담을 수 없음을 밝혔다. 도덕경은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로 시작한다. 또, 부처님의 법은 무유정법(無有定法)이라고 한다. 모두 언어의 불완전성을 말한다. 더욱이 사람에게는 특성과 근기가 있다. 한 스승의 말씀을 같이 듣는다고 해도 듣는 사람에 따라 이해하는 것이 다르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그린 토끼-오리의 그림처럼 같은 내용이라도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이해하는 것이 언어가 가진 한계다.

법문이 ‘여시아문’으로 시작한다는 것은 누군가가 그의 상황에 맞게 들은 것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진리를 언어로 표현했고, 이를 통해 누군가의 지혜가 밝아졌었던 기록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법문을 읽을 때, 상황성을 살펴야 하고 나를 돌아봐야 할 것이다. ‘여시아문’의 법문을 받들면서 “나는 어떻게 이해할까?”를 고민해야 한다. 나의 문제와 나의 마음에 적용을 시켜서 내 마음속에서 부처를 찾고 진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법문이 분별하는 지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실적인 마음공부의 자료가 될 것이다.

생활 속에서도 ‘여시아문’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각자의 생각과 감정을 소통한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감정의 몇 퍼센트를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내가 표현한 말의 몇 퍼센트를 상대방이 이해할까.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니어서 오해와 갈등으로 이어지곤 한다. 우리는 대화를 하면서, 상대방의 의도를 내 생각으로 예측하고 판단해 듣는다. 이는 피할 수 없는 인식과정이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들은 것을 바탕으로 한 나의 판단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대종사는 ‘처처불상 사사불공’을 말씀했다. 내가 대하는 부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나의 분별사량으로 쉽게 예단하지 말고 부처님의 본의를 생각해 봐야 한다. 이것이 모두로 부처님으로 보고 불공하는 첫걸음이 아닌가 한다.

/영산선학대학교

[2022년 1월 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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