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법 교무
김지법 교무

[원불교신문=김지법 교무] 『장자』는 거대한 물고기 곤(鯤)이 거대한 새 붕(鵬)으로 변해 엄청난 거리를 날아가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신화(神話)와 같은 이야기에 대해 매미와 비둘기는 “우리는 힘껏 날아올라야 겨우 느릅나무에나 오를 뿐인데, 대붕(大鵬)은 어찌하여 그렇게 높이 오르고 멀리 날아가려 하는가?”라면서 비웃는다. 

장자는 매미와 비둘기의 대화에서 작은 지혜가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함을 말한다. 경험의 차이는 견해의 차이를 불러온다. ‘나’의 경험이 세상을 보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작은 견해로는 대붕이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장자는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은 작은 지혜를 비판한 것이 아닐까.

연구에 따르면, 『장자』의 판본은 다양하고 그 분량도 상이하지만, 현재는 서진(西晉) 시기의 곽상(郭象)이 정리하고 주석한 것이 저본이다. 곽상은 이 부분을 어떻게 봤을까. 크고 작은 존재들은 각기 타고난 바가 다르므로, 각각의 특성과 역할은 다르다. 경험의 차이에 따른 견해의 차이는 어쩔 수 없으나, 본질적으로 비행(飛行)할 수 있는 능력의 원리적 차이는 없다. 대붕이나 참새나 매미 모두 날아다닐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지혜의 차이를 주목하면 큰 지혜와 작은 지혜의 분별이 되지만, 능력의 원리를 주목하면 크고 작음의 분별은 없다. 각자의 타고난 몫에 따라 행할 뿐이다.

장자의 이야기를 주목하면, 이러한 곽상의 해석은 지나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뒤에 나오는 이야기를 결부해 생각하면 곽상의 견해가 이해된다. 열자(列子)는 바람을 타고 다니면서 15일이 지나서야 돌아온다. 하지만 그 역시 바람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날 수 없다. 만약 천지 본연의 모습을 따르고 자연의 변화에 순응하여 무한의 세계에 노닌다면, 대체 무엇을 의지할 것이 있을까.

열자의 이야기를 함께 생각해보면, 결국 큰 지혜라 하더라도 결국 의지하는 바가 있고, 그 한계는 있다. 어떤 존재가 날기 위해 양력(揚力)이 필요하다면, 그 존재보다 더 큰 존재, 즉 하늘이 있다는 것이 아닐까.

하늘 아래에서 나는 것은 크고 작음의 차이가 있다 한들 본질은 서로 다르지 않다. 크고 작음의 분별도 기준점이 있고 비교함이 있을 때 성립한다. 만약 분별의 기준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대붕이 참새와 매미를 비웃는다면, 대붕보다 더 큰 존재는 대붕을 비웃지 않겠는가. 

그래서 곽상은 크나 작으나 그 원리, 즉 도(道)를 깨달을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 바다에 비유하면, 바다에는 크고 작은 파도가 있다. 큰 파도 작은 파도 모두 바닷물로 이뤄져 있고, 모두 생겼다가 사라진다. 그런데 바다와 파도는 이름은 다르지만 실은 둘이 아니지 않은가. 대붕과 참새도 실은 둘이 아니다.

/3대결산총회준비위

[2022년 1월 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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