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원 김기덕 원로교무
이타원 김기덕 원로교무

[원불교신문=장지해 기자] 스물두 살, 당시로써는 꽤 늦은 출가 서원이었다. 디자인에 관심이 있어 양재학원(양장 디자인 학원)을 다니던 그를 출가하게 한 데에는 여러 명의 집요함이 있다. 그러나 정작 당시 영산선원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작은 오빠(고 은산 김장원 종사)에게는 출가 권유를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는데….

서원을 세우게 된 계기에 대해 “우리집에 수시로 드나들던 영산선원 학생들과 교무들의 꼬임(?)에 넘어갔다”고 말하며 웃는 이타원 김기덕 원로교무(里陀圓 金基德·76세). 그의 고향은 소태산 대종사와 같은 영촌마을이다.
 

여고생 세 명으로 시작된 교화
“처음에는 교무가 뭔지 제대로 몰랐어요. 늦게 들어왔기 때문에, 특별히 힘든 것도 없었지만 재미도 크게 느끼지 못했지요.” 대구교당에서의 간사 생활과 영산·동산선원에서의 학업기간을 ‘덤덤했다’고 표현하는 김 원로교무. 그러다 첫 교화 현장인 대연교당에 부교무 발령을 받고서야 ‘이게 교무 생활이구나. 이게 수도인·성직자의 생활이구나’를 차츰 느끼게 됐다. 양재학원을 다니며 익힌 솜씨도 종종 발휘되곤 했는데, 간사 생활을 할 땐 항타원 이경순 종사의 블라우스를 직접 만들기도 했다고.

대연교당에서 부교무로 3년을 근무한 그는 삼랑진교당 교화를 담당하게 된다. ‘삼랑진에 대연교당 교도의 사돈이 한 명 있다’는 이유로 만들어진 연원교당의 책임을 맡게 된 것이다. 교도도 아닌 한 사람으로 비롯된 삼랑진역 도로변 80만원짜리 전셋집. 그곳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혼자서라도 매일 기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기도를 하고 있는데, 문소리가 살짝 나는 거예요. 기도를 마치고 뒤를 돌아보니까 여고생 세 명이 앉아있었어요.”

지나가다가 기도 소리를 듣고 들어왔다는 여고생 세 명은 교화 종자가 되어 김 원로교무의 열정에 불을 지폈다. 그렇게 삼랑진교당 학생교화가 일어나면서 자연스레 학생들의 형·누나들이 모여 청년교화까지 활성화됐다. 후에 유치원을 만들자 어린이·일반교화도 함께 확대됐다. 

삼랑진교당을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도 그때다. 없는 형편이기에 그는 학생·청년회원들과 함께 교당 수리에 필요한 흙이나 모래 등의 재료들을 어딘가에서 구해왔다. “언젠가는 재료를 실어오려고 자전거를 타고 앞서다가 논에 파묻힌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김 원로교무의 표정에는 고됨의 흔적이 없다. 

“힘들긴 했지만 재미있었어요. 청소년교화가 일어났고, 전무출신들이 배출됐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가장 보람 있는 근무지로 기억되고, 힘든 건 생각이 별로 안 나요.”
 

기덕아, 내가 너를 잘 안다
삼랑진교당에서 7년을 근무한 그는 공주교당으로 발령 받는다. 당시 그곳은 ‘흉가’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법당 참배를 하는데 오싹한 느낌이 들었고, 으스스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그렇게 그는 짐을 풀지 못한 채 신도안으로 향한다.

‘못 살겠습니다’를 말하러 간 곳. 하지만 눈물이 펑펑 쏟아지는 바람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그를 대산종사는 가만히 기다려줬다. 한참 후 스스로 눈물을 닦고 절을 올리며 ‘저 가볼게요’라고 하자 대산종사가 말했다. “기덕아, 너 그럴 줄 알았다. 내가 너를 잘 안다. 힘들어도 마음 잘 잡고, 소태산 대종사님 법대로 그렇게 살아봐라.” 

이후 교당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신도안을 찾아갈 때의 발걸음과 분명 달라져 있었다. 그렇게 공주에서 7년, 그는 교당 신축까지 이뤄낸다.

 

디자인 관심, 양장 학원 다니다 출가
발령받은 곳마다 교당 신축, 이전, 수리
향산 종사 “사심 없이 공심만 가지고 살라”


혈연이자 법연, 은산 오라버니
이후 월명교당에서 10년, 반포교당(현 한강교당)에서 6년, 진북교당에서 7년을 근무한 그. 한 생 걸어온 길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발령받는 곳마다 교당을 수리하거나 만들거나, 옮기는 일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들을 원망한 적은 없다. 아무리 그렇대도 힘들지 않았을 리 없다. 힘들 땐 어떻게 극복했냐고 묻자, 그는 작은 오빠인 은산 김장원 종사 이야기를 꺼냈다. 도움이나 위로를 직접 받은 적은 없지만, 마음의 의지처로서 큰 힘이 됐다는 것. 어렵고 결정할 일이 있을 땐 해결 길을 열어주고, 좋은 일을 공유하면 함께 기뻐해주던 존재가 생각날 때가 종종 있다고 했다. “현직에 있을 땐 가족에게 더 엄하고 칭찬에 인색했던 은산님이 퇴임 후에는 참 잘 해주셨다”고 말하는 김 원로교무의 미소에 그리움이 함께 담긴다.
 

퇴임 후 자원봉사 6년
작년까지도 교화 현장에 있었지만, 사실 그는 7년 전 퇴임을 했다. 진북교당에서의 근무를 마치고 퇴임 후 자원봉사로 6년 동안 이평교당을 지켜온 것. ‘어려운 교화 현장의 힘이 되어 달라. 도와달라’는 후배들과 현장의 요청을 모른 척할 수 없어 하게 된 자원봉사였다. 길어야 2~3년 생각한 시간이 6년을 꽉 채우면서, 덕분에 그가 지켜온 이평교당은 올해 정식 교무 발령이 이뤄졌다.

그는 자신이 퇴임 후 자원봉사로 교화 현장 하나를 지켜갈 수 있도록 힘을 보태 준 진북교당 교도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교무는 교도들을 통해 힘을 얻는다”며, “교도들에게 힘을 얻기 위해서는 원칙과 법대로 바르게 해야한다”고도 강조했다.

덧붙여 얼마 전 소태산 대종사 탄생가에서 만난 한 예비교무의 이야기를 꺼내는 김 원로교무. “누군가에게 들으니, 매일 탄생가에 와서 청소도 하고 기도도 하는 예비교무라는 거예요. 그 후진을 통해 ‘저런 후진들이 있으니 우리 교단은 앞으로 더 발전되겠다’는 희망을 봤어요. 정신없이 변하는 시대에 맞춰 살다 보면 전무출신으로서의 사명감이 약해질 수 있는데, 그럴수록 서원을 더욱 잘 키워서 교단의 참다운 주인공, 세상을 지도하고 이끌어가는 인물이 되어주길 바라요.”
 

사심 없이 공심만 가지고
그는 교역 생활을 해오는 동안 ‘사심 없이 공심만 가지고 살라’는 향산 안이정 종사의 말을 마음에 깊이 담아왔다. 이유가 있다. 아버지가 향산 종사에게 자녀들을 부탁하는 말을 남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열반하신 것. 그러니 자신을 향한 향산 종사의 당부는, 아버지의 당부이기도 했다.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를 잘 보살펴 훌륭한 인물로 잘 키워달라고 부탁을 하셨다. 항상 그 아버지의 뜻을 잘 받들어서, 사심 잡념이 생기면 버리고 공심으로 교단을 위해 살아가는 훌륭한 법자가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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