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현 교무
김도현 교무

[원불교신문=김도현 교무] “세존이시여. 무상정등정각을 얻고자 마음을 세운 선남자 선여인은 어떻게 그 마음에 머무르며, 어떻게 (물러서는) 마음을 항복 받습니까?(世尊 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應云何住 云何降服其心).”

‘응운하주 운하항복기심’은 『금강경』을 읽어나갈 때도 중심이 되는 질문이고, 공부인들이 살아가면서 잊지 않고 되새겨야 하는 화두이다.

산스끄리뜨어 『금강경』의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이 질문이 2가지가 아니었음은 많이 알려졌다. 한역 경전의 생략과 오역을 수정하고자 인도까지 왕래한 현장은 “응운하주 운하수행 운하섭복기심(應云何住 云何修行 云何攝伏其心)”이라 하여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무르게 하고, 어떻게 수행하며, 어떻게 섭복시켜야 합니까?”라고 번역하였다. 하지만 구마라집의 번역이 가장 널리 읽혔고 많은 선지식들이 구마라집의 번역을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구마라집의 번역에 그만한 지혜가 담겨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문제는 ‘주(住)’에 대한 풀이다. 주(住)는 연결되는 말에 따라서 ‘머물다, 집착하다, 살다’ 등으로 풀이된다. 수보리의 질문도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무상정등정각을 얻고자 서원을 세운 사람 혹은 보살의 길에 나아가고자 뜻을 세운 사람이 어떻게 그 마음에 머물 수 있느냐?”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질문은 “그 서원에서 멀어지는 마음을 어떻게 항복받느냐?”가 된다. 이는 서원을 강조하는 풀이다.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라고 했다. 처음 세운 깨끗하고 올곧은 마음이 바로 정각의 마음이다. 무상정등정각을 얻겠다고 뜻을 세운 공부인이 그 마음에만 평안히 머물 수 있다면 바로 부처인 것이다.

또, “어떠한 곳에 마음이 머물러야 하느냐?”는 질문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 마음 자리를 떠난 모든 망상(妄想)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가 이어지는 질문이 된다. 이렇게 보면 『금강경』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응무소주이생기심’과 이어진다. 주한 바 없는 그 자리에 머무르고, 그 마음을 벗어나지 않고 마음을 내는 것이 『금강경』의 공부길이다.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는 질문이 되기도 한다. 곧 무슨 일을 하면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느냐는 질문이다. 이어지는 질문은 “그러한 삶을 살면서 어떻게 욕심을 항복받을 수 있느냐?”가 될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교리도에서 ‘인생의 요도’와 ‘공부의 요도’를 밝혔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과 해야 할 공부를 제시한 것이다. 『금강경』의 2가지 질문과 묘하게 이어진다.

『금강경』에 등장하는 부처님과 수보리의 본의는 무엇이었을까? 궁금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나의 공부길이다. ‘나의 서원, 내 마음이 머무를 곳, 나의 삶.’ 『금강경』을 읽을 때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영산선학대학교

[2022년 2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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