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해 기자
장지해 기자

[원불교신문=장지해 기자] 서울로 출장을 갔다. 지하철 환승을 위해 5호선 여의도역을 거치는데,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경쾌해진다. 순간 ‘왜 이러지?’ 하고 생각한다. 서울의 복잡함 속에 들어있는 활력과 생기, 아마 그것이 몸으로 와닿은 것 같았다. 몇 개월 만에 다시 느끼는 분위기였다.

출장을 다녀온 후 지인에게 “서울 공기 너무 좋아요!” 하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는 “교무님, 서울 공기가 좋다는 건 거짓말 아니에요? 서울이 익산보다 어떻게 공기가 좋아요?”라고 반문했다. 내가 좋다고 한 ‘서울 공기’는 서울의 분위기, 말하자면 서울의 역동적인 모습에 대한 표현이었다.

익산에서 태어나 익산에서 자라고 익산에서 대학과 대학원까지 졸업한 나는 그야말로 ‘익산 사람’ 그 자체였다. 그러니 첫 발령이 나기 전까지 내 세계는 온통 ‘익산’에 한정돼 있었다. 그때의 나는 “이만한 도시에서 살면 충분하지”를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그랬던 내가, 어쩌다 수도권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그리고 수도권 생활 11년 만에 내 세계라고 한정 짓던 공간에 대한 확장이 일어났다. ‘사람이 많고 복잡해서 싫다’던 서울도 사랑하게 됐다. 과거의 나를 생각하면 엄청난 생각과 마음가짐의 변화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신기하기도 하다.

돌아보면 이유는 간단하다. 결국 환경의 변화와 그 속에서 이뤄진 경험의 영향이다. 나의 시선을 어디에 어떻게 두느냐에 따라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세계가 무궁무진하게 변화함을 알게 된 것이다. 나는 내 세계가 익산일 때는 익산을 사랑했고, 내 세계가 서울로 확장되면서는 서울을 사랑하게 됐다. 앞으로의 나는 어떨까. 내가 관심 두는 세계가 커질수록 더 많은 것을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 세상이 됐다고 한다. 지구촌 시대라는 말은 오래됐고, ‘이제는 세계화가 일상이 된 시대’라고도 한다. 그런데 최근 국외에서는 전쟁이 일어났고, 국내에서는 큰 산불이 났다. 이러한 때, 우리의 사랑은 어디를 향해야 할까.

소태산 대종사는 “공부인들이 미한 때에는 자기와 천지 만물의 관계를 모르고 지내다가, 차차 공부가 익어 가면서 그 모든 내역과 관계와 도리를 알게 된다”고 했다(『대종경』 제15 부촉품 14장). 어느 날 우크라이나 전쟁 상황 뉴스를 보다가 문득 마음에 솟은 ‘우크라이나를 위한 기도’라는 한 문장이, 차차 철이 들어가는 증거이길 바라는 요즘이다.

나의 사고, 나의 범위, 나의 세계를 넓혀가자. 내 가정에서 이웃으로, 이웃에서 우리나라로, 우리나라에서 이웃 나라로, 전 세계로, 그리고 우주 전체로.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려면 마음 세계를 넓혀야 한다.

[2022년 3월 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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