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현 교무
김도현 교무

[원불교신문=김도현 교무] 대승의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보살)은 일체중생을 제도하여 열반으로 이끌겠다는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그런데 모든 중생을 다 열반에 들게 하여도, 실제로 제도를 받은 중생은 없다. 왜냐하면 보살은 상(相)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금강경』 3장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소명태자가 붙인 3장의 제목은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이다. ‘대승의 바르고 으뜸되는 가르침’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이 대승정종분에서 대승의 공부는 일체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서원과 모든 상을 놓고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만 보면, 우리가 많이 독송하는 『금강경』에서 인상적인 한 구절이 빠진 것 같다. 수보리의 질문이기도 한 ‘욕심을 항복받는 법’에 대한 내용이 빠졌다. 구마라집 본 『금강경』은 아래와 같이 마음을 항복받는 법을 다루고 있다.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보살 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한다(佛 告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降服其心).”

여기의 응여시항복기심(應如是降服其心)은 구마라집의 의역이다. 현장은 이 부분을 “응당발취여시지심(應當發起如是之心)”이라고 번역하였다. “마땅히 이와 같이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는 뜻이다. 구마라집의 ‘항복기심’이라는 의역은 앞에 나온 수보리의 질문 중 하나인 ‘운하항복기심(云何降伏其心)’을 고려한 것일 수도 있다. 혹은 대중을 위해 한 가지 방편을 넣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전에 언급한 것과 같이 『금강경』은 보살을 위한 경전이다. 이미 성불제중의 서원을 세운 공부인을 위한 경전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보살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바로 설명한 것이 『금강경』 3장의 내용이다. 하지만 서원을 세웠다고 해서 삿된 욕심이 일시에 소멸되어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또한 아직 굳게 서원을 세우지 못한 공부인들도 있을 것이다. 

구마라집은 이런 사람들을 위해 ‘나를 괴롭게 하는 삿된 마음을 항복받는 방법’이 서원을 세우고 상을 없애는 것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 같다.

‘오욕을 다 없애고 수도에 전일하여 한가롭고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는 방법’을 묻는  제자에게 “욕심은 없앨 것이 아니라 도리어 키울 것이니, 작은 욕심을 큰 서원으로 돌려 키워서 마음이 거기에 전일하면 작은 욕심들은 자연 잠잘 것이요, 그러하면 저절로 한가롭고 넉넉한 생활을 하게 되리라”(『대종경』수행품 36장)고 한 소태산 대종사의 법문이 생각난다.

서원을 세우고 상을 없애는 것. 우리 공부인이 가져야 할 마음이면서 또한 삿된 욕심을 항복받을 수 있는 요긴한 방법인 듯하다.

/영산선학대학교

[2022년 3월 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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