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고준영 교무] 한 봉사단원이 티벳 승려들과 회의 중, 파리 한 마리가 자신의 찻잔 속에 빠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인도에서 오랜 생활을 해온 그는 벌레나 곤충에 대해 면역이 생겼다고 나름 자부했고, 위생 개념에 집착하지도 않았으나 미간이 약간 찡그려지는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표정 변화를 알아차린 한 승려가 무슨 문제인지 물었고, 벌레 하나 때문에 평정심 잃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 그는 “No problem. 그저 제 찻잔에 파리가 빠졌을 뿐이에요” 하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걱정하던 승려는 “아아, 찻잔에 파리가 빠졌네요…”라며 찻잔에 손가락을 넣어 조심스럽게 파리를 건져주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다시 한참 회의를 하는데 그 승려가 갑자기 환한 얼굴로 돌아왔고, 기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파리는 이제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 잘 날아갔어요!”

나의 울타리는 어디까지인가? 입장을 생각하고 배려해주며, 자비를 베푸는 그 울타리가 어디까지인가? 한번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그 울타리가 오직 나 자신까지일수도, 내 가족 또는 친척이나 주변 사람들까지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 울타리 안에 아무도, 심지어 자신조차도 들어갈 수 없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그 울타리에 들어가지 못할 생령이 없는, 모두를 품어 안는 분도 있습니다. 문제는, ‘내 울타리에는 모두 들어올 수 있어’ 또는 ‘나는 그 사람의 입장을 충분히 생각하고 있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상대를 생각했다고 착각하지만 실상은 전혀 아닌 경우, 정말 빅 프라블럼(Big problem)입니다.

 

부처님은 울타리라는 개념 없이
아예 울을 벗어나 계십니다
나의 자비의 그늘에서는 
누가 쉬고 있나요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본다는 것은 내 자리에서 상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자리에 서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꽤 공력이 들기에 힘들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답을 잘 모를 때, 우리는 교법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내가 못 당할 일은 남도 못 당하는 것이요, 내게 좋은 일은 남도 좋아하나니, 내 마음에 섭섭하거든 나는 남에게 그리 말고, 내 마음에 만족하거든 나도 남에게 그리 하라. 이것은 곧 내 마음을 미루어 남의 마음을 생각하는 법이니, 이와 같이 오래오래 공부하면 자타의 간격이 없이 서로 감화를 얻으리라.” (『대종경』 제4 인도품 12장)

성향이 다르면 특정 분야에 있어 호불호가 있을 수 있으나, 대체로 좋아할 일과 싫어할 일은 누구나 비슷합니다. 이익이 되면 좋고, 해가 되면 싫어합니다. 인정받으면 좋아하고 무시당하면 싫어합니다. 이것은 남녀노소를 막론한 문제입니다.

혹, 성향이 너무 다른 사람이라 해도, 그 사람이 나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배려한다고 느끼면 그 사람을 싫어하지 못합니다. 그 배려가 나에게 조금은 불편할지라도 말이죠.

반대로, 내가 상대를 정말 좋아하고 배려하고자 하면 그 사람은 저를 좋아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체로, 나에게 상처인 일은 남에게도 상처입니다. 내게 행복하고 좋은 일은 남에게도 행복하고 좋은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상대를 생각해주려는 ‘그 마음’입니다. 처음에는 틀릴 수도, 핀트가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상대를 진정으로 위하는 그 마음으로 소태산 대종사의 말씀처럼 ‘오래오래 공부하면’ 결국 너와 나의 구분이 사라지고, 나를 만나는 모든 이들로 하여금 깊은 감동과 감화를 줄 수 있습니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것’은 가족 관계에서 더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라고 할 때 그 ‘다른 사람’에 ‘친구, 직장 동료, 이웃’ 등 주변인은 접목시키려 노력하지만, 그 대상이 가족이 될 때는 어렵습니다. 가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기대치가 있고, 너무나 편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이해해주고 좀 참아줄 일을, 가족에게는 어렵습니다. ‘참는 것은 사회생활의 일환이고, 집에서까지 사회 생활하면 피곤하니까’라고 생각한다면, ‘사회 생활을 하기 위해 참는 것’과 ‘사랑과 자비로 가득해서 참고 배려하는 것’은 시작부터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지만, 가까운 가족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갈등은 깊고 큰 상처를 남길 수 있습니다. 나는 부모님, 배우자, 자녀의 입장을 생각한다고 하지만, 정말 그 사람의 자리에서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그 사람의 자리에 서서조차 나의 눈으로만 바라보지는 않았나요?

반대로, 상대에게는 잘하면서 오히려 나를 향한 자비가 어려운 사람도 있습니다. 남을 과히 신경쓰다 보니 오히려 자신을 소홀히 하고, 내가 상처받거나 배려받지 못한 일에 대해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저 사람은 참 착한 사람’이라고 하겠지만, 누구보다 소중한 자신을 온전히 이해해주거나 배려하지 못하는 사람은 행복해지기 어렵습니다. 내 울타리 안에 내가 없다니… 내 자신이 나의 자비 그늘에 들어와있지 않다니… 어느 곳에 마음을 의지하고 살 수 있을까요. 상처받지 않기 위해 몇 겹의 껍데기를 씌운, 또는 상처 위에 몇 겹의 딱지를 만들어낸 나 자신에게 가만히 물어봐야 합니다. ‘정말 괜찮니? 아니면 괜찮은 척 하는거니?’ 나조차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느 곳에 있든 마음 편히 쉴 수 없습니다.

이번에는, 시야를 좀 더 넓혀서 생각해봅시다. 스승님들께서는 상대의 입장을 생각해보고 그들을 위하는 마음의 울타리가 당연히 우리보다 더 넓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자비는 사람뿐만 아니라 미물 곤충에게까지도 미칩니다. 정산종사께서는 “동기연계(同氣連契)”라고 하셨습니다. “같은 기운으로 연하여 맺어져 있다”, 즉 “한 기운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인류뿐만 아니라 ‘동물’과 ‘벌레’, ‘곤충’들까지도 본래 하나의 큰 기운으로 연결되어 있고, 부처님은 이 사실을 아시기에 “시방일가 사생일신 (十方一家 四生一身)”하십니다. 울타리라는 개념이 없이 아예 울을 벗어나 계십니다.

“대범 진여묘체는 법계에 충만하옵고, 반야대지는 시방에 통철하사와 어느 사물이 그 묘리에 계합되지 않는바 있사오며 어느 생령이 그 자음에 들지 않는 이 있사오리까.” 

우리는 모두, 진리의 자비로운 그늘에 들어있습니다. 성자 성현들의 자비 그늘에 쉬고 있습니다. 지금 나의 자비의 그늘에서는 누가 쉬고 있나요?
 

고준영 교무
고준영 교무

/강남교당

[2022년 3월 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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