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도 대각개교절 봉축주제가 ‘다 같이 다 함께’로 정해졌다. 아마 사회적으로나 교단적으로 뜻과 힘을 합쳐 헤쳐가야 할 일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같이의 사전적 의미는 ‘둘 이상의 사람이나 사물이 함께’이며, 함께의 사전적 의미는 ‘한꺼번에 같이’란 뜻을 담고 있으니 둘은 유의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둘을 굳이 구별하자면 ‘같이’는 일치를 요구하는 군무적 요소를 함의하고 있고 ‘함께’에는 다양한 악기들이 하모니를 이루어 조화로운 소리를 내는 앙상블의 요소를 함의하고 있다. 또 ‘같이’에는 다름이, ‘함께’에는 따로가 반어적으로 붙는다. 따라서 같이는 대체로 뜻의 일치를, 함께는 다름의 인정을 통한 행위의 통일을 요하고 있다고도 보아진다.

그럼 왜 ‘다 같이 함께’여야 할까. 아마 코로나19 팬데믹 시대를 거치면서 세상이 급격히 가로막히고 분열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국제사회는 늘 그러기도 했지만, 요즘 부쩍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동맹국에까지 목조르기를 할 정도이다.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다. 70여 년 전 남과 북의 분열이 그 원인이라고 하지만, 지금도 끊임없이 여러 형태의 갈라치기 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지방색과 당파로 분열되던 시대는 고전이 되었다. 이제는 세대별로, 남과 여로, 지방과 수도권 학교로, 더 정교하게 이대남과 이대녀 등으로 분열하고 쪼개는 것에 여념이 없다. 대립과 갈등을 조장함으로써 누가 그 이익을 쓸어 가는 것일까.

이런 부분에서 원불교 교단도 자유롭지 못하다. 원불교에서는 그동안 공의와 공익 정신에 바탕한 구성원들의 일치와 화합이 자랑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이런 부분은 희석되었으며, 교당과 기관, 중앙과 지방, 남자와 여자, 그리고 이제는 재가와 출가 등으로 분열되는 양상을 보여 안타까움을 더한다. 하지만 이 불신의 경계선을 살펴보면 뚜렷한 이유를 찾아보기 힘들고, 정서적 피해의식이 올가미처럼 엮어져 있다. 교단 역시 사회와 함께 가기에, 그 시대정서를 피해가기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하지만 불신의 시대일수록 종교의 역할은 더욱 커짐을 우리는 안다.

이제 곧 폐쇄적 코로나 시대를 건너야 할 것으로 보인다. 2년 여 동안 지속된 코로나 시대가 남긴 상처는 깊다. 그 동안 격리 되고, 따로 놀고, 얼굴을 가리며 호흡을 참던 시대를 걷어내야 한다. 그래서 ‘다 같이 다 함께’ 뜻을 합치고 힘을 뭉쳐서 다시 한껏 어울려 살아가던 그 세상을 회복해야 한다. 그 길에 원불교 사람들이라면 제일 앞장서서 ‘같이 함께’ 해야 하지 않을까. 특히 혁신의 길을 걸어야 하는 교단은 어떻게 소태산의 길을 다 같이 다 함께 걸어가고 확장해 갈지 세밀히 점검하고 계획해야 할 것이다. 

이번 대각개교절은 그래서 큰잔치가 기대된다. 다 같이 다 함께.

[2022년 3월 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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