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장지해 기자] 지치고 힘들 때, 그림을 그리면 저절로 쉼(休)이 된다. 그래서 이름 붙이기를 ‘원묵화(圓墨畵)’라 했다. 원묵화는 원불교의 법문을 명상과 차와 선의 정신을 함께 담아 마음공부하며 그리는 그림이라는 뜻이다. 복타원 김원도 원로교무(福陀圓 金元道·77)의 방에는 은은한 묵향이 풍긴다. 그리고 그가 그리는 작품 속 인물들의 표정은 김 원로교무를 꼭 닮았다. 그림은 결국 자신을 투영하는 일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복타원 김원도 원로교무
복타원 김원도 원로교무

자연스럽게 고른 검은색 외투
여상을 졸업한 후 시험을 봤고, 군무원 4급에 합격했다. 4급임에도 “초보에게 4급 일을 맡길 수 없다”고 해 5급으로 일을 했다. 당시는 그게 통용됐다. 그렇게 직장생활을 했지만 1년 6개월 만에 그만뒀다. 계기가 있었다.

“군산에 사는 외할머니(김세화행, 『한울안 한이치에』 제1편 법문과 일화 7편 기연 따라 주신 말씀 7절에 등장)가 자취집에 찾아왔어요. 밤에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러는 거예요. ‘교당 가서 2년만 봉사하면 4년 장학생으로 대학을 다닐 수 있다더라’고요. 전무출신 하라는 직접적인 이야기는 못하고, 돌려 말씀하신 거죠. 그게 힌트가 된 것 같아요.”

부모님은 8남매의 대학까지 감당할 수 없었기에 그는 직장생활을 해서 돈을 모아 대학을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중학생 때 군산교당에 다니며 전무출신의 길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던데다, 할머니에게 이야기를 들으니 솔깃해졌다. 고민이 이어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 외투를 사더라도 검은색만 고르는 자신을 발견했다. 나일론으로 된 검은색 치마와 저고리도 준비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혼자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죠.” 

결심이 선 그는 일단 짐을 모두 정리해 집으로 보내고, 대전교당에 들어가 하숙을 시작했다. 전무출신을 하고 싶은, 대학에 가고 싶은 마음에 혼자서 내린 결정이었다. 그렇게 교당에서 출퇴근하던 어느 날 청년법회 시간에 “우리의 공부법은 난리 세상을 평정할 병법이요, 그대들은 그 병법을 배우는 훈련생과 같다(『대종경』 수행품 58장)”는 법문이 마음을 가득 울렸다. 김 원로교무는 스물세 살 되던 해에 대구교당에서 간사근무를 시작한다. 


선택으로 시작한 삶
“그때는 공양원을 구하는 곳이 많아서, 간사근무지를 선택할 수 있었어요.(웃음)” 
대전교당 청년회 시절, 부교무 강습을 가는 부교무님을 따라 총부에 갔다. 여러 곳에서 공양원을 원했으나, 대구교당을 선택했다. 아버지 전근으로 김천에서 여고를 다닐 때 항타원 이경순 종사가 집에 와 출장법회를 봤던 기억이 인연이 됐다. 간사근무를 마치고 스물다섯에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에 입학하니 학년에서 나이가 가장 많았다. 다른 교우들보다 늦게 시작했다는 생각에 다른 것은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책상에 앉아 공부만 했다. 그러면서도 고등학교 때부터 하던 정구는 계속했다. 그때부터 시작한 운동은 퇴임 후 현재 매일 한 시간 이상 탁구 치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마음 난리 평정하는 도원수 되고자 출가 서원
산업기관, 복지기관, 교화기관에서 각각 3분의 1의 세월
5월 19일부터 일주일간 익산 예술의전당에서 네 번째 개인전

3분의 1씩
부산교당과 수양의집에서의 짧은 기간을 제하고 나면, 그의 교역 생활은 크게 세 분야로 정리된다. 산업기관에서 3분의 1, 복지기관에서 3분의 1, 교화현장에서의 3분의 1이 그것이다.

첫 번째 3분의 1은 대구원광한의원에서의 13년이다. 갓 신설된 곳에서 역할도 하고, 건강도 회복하라는 뜻이 담긴 인사였다. 초창기에 합류해 대구원광한의원이 약전골목에 번듯한 건물을 세우는 데에도 역할을 했다. 그러니 교역생활 초반의 노력과 정성이 담긴 기관의 폐업 소식을 들었을 땐 속상했을 수밖에.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으리라 이해하려 한다.

두 번째 3분의 1은 삼정원과 원광종합사회복지관에서의 12년이다. 삼정원에서 김 원로교무는 환자들의 정신건강 회복을 위해 주로 노력했다. 그들이 법회 시간에 우렁차게 부르던 성가 소리는 지금도 인상 깊게 남아있다. 원광종합사회복지관에서는 어린이집을 함께 운영하면서 프로그램을 30개까지 확장해 지역사회를 위한 활동을 했다.

마지막 3분의 1은 교당교화현장에서의 12년이다. 원광종합사회복지관에서의 근무를 마칠 즈음 인사 요청이 온 곳은 또 복지기관이었다. 김 원로교무는 이때 용감한 결단을 내렸다. 교무의 꽃은 교화 아니던가. 교화현장으로 발을 내딛은 것이다. 그렇게 금산교당과 신태인교당에서 근무를 했다. 교당은 기관에 비해 더 아늑한 느낌이 있었다.
 

그림은 수행
김 원로교무는 대구원광한의원에 근무하던 30대 때 붓을 처음 잡았다. 약전골목에 대구교당 교도의 화실이 있었는데, 은행을 다녀오겠다고 하고 화실에 들러 그림 연습을 하거나 그림 체본을 받아왔다.

하지만 잠시 붓을 놓았던 김 원로교무는 퇴임 후 본격적으로 그림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다 우연히 함평국화축제에 갔다가 선묵화 창시자이자 대가인 담원 김창배 교수의 작품을 보고 익산과 서울을 오가며 사사 받았다. 김 원로교무는 “40대 때 ‘나이 들어 늙으면 어깨도 아프고 힘이 들어 먹 갈기가 힘들 텐데’ 싶어 붓을 놓았었는데, 이제는 먹물이 있어 먹 갈 일이 없다”는 웃음 섞인 말로 그림 그리는 행복을 표현했다. 그는 그동안 3번의 개인전을 진행했고, 돌아오는 5월 19일부터 일주일간 익산 예술의전당에서 네 번째 개인전을 연다.


꾸준한 정성심으로 열어가는 길
김 원로교무는 인연이 닿는 후배들에게 “나가지만 말고 살라”고 당부한다. 짧은 한마디에 들어있는 의미는 이렇다. 어떤 괴로움과 요란함 속에서도 이 길을 꾸준히 가는 것이 곧 성공하는 삶이 된다는 것. 그가 덧붙인다. “변덕부리지 않고 꾸준한 정성심이 중요하고,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길은 반드시 열린다”고.

[2022년 3월 14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