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현 교무
김도현 교무

[원불교신문=김도현 교무] 『금강경』은 공(空) 도리를 다룬 경전이라 말한다. 간략히 설명하면 공(空)이란 사상(四相)으로 대표되는 분별심을 벗어난 경지를 말하는 것이고, 『금강경』은 단지 공에 머무르라는 것이 아니라 ‘공(空)사상에 바탕하여 사상(四相)의 차별심 없는 무상행(無相行) 혹은 보살행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상(相)이란 것은 무엇일까?

상(相)의 산스끄리뜨 원어는 saṁjñā이고, 반대말은 prajñā이다. saṁjñā는 산냐(散若) 또는 상(相, 想)으로, prajñā는 반야(般若) 혹은 지혜(智慧)로 한역된다. 그러니, 상(相)은 부처님의 지혜와 대비되는 중생의 견해를 말한다. 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생각 혹은 고정관념을 상이라 할 수 있다. 불교의 개념을 넣어서 생각하면 ‘어떤 것을 고정불변하는 실체라고 여기는 생각’, 나아가 ‘고정불변하는 실체는 존재한다는 생각은 잘못되었다는 생각’까지도 상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나’, ‘나의 것’이라는 생각인 아상(我相)이다.

그런데 한역 『금강경』의 상(相 혹은 想)과 산스끄리뜨 『금강경』의 산즈냐(saṁjñā)의 내용을 보면 비교자체가 의미 없을 정도로 개념이 다르다. 산스끄리뜨 본에는 산즈냐의 예로 아트만(ātma)·사트바(sattva)·지와(jīva)·푸드갈라(pudgala)가 언급된다. 구마라집은 이를 아상(我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인상(人相)으로 번역하였지만, 의미와 순서가 다르다. 현장은 몇 개의 개념을 더해서 8개 혹은 9개의 상(想)을 말했다. 이 차이는 인도인과 중국인이 가진 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이 가지고 있지도 않는 ‘아트만’이나 ‘지’와 같은 개념을 설명하고, 이를 제거하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한역 『금강경』은 인도 사상(四相)과 다른 중국의 사상을 제거하라고 말한다.

소태산 대종사도 사상에 대해 설명했다. 아상은 자기 본위의 생각과 자존심, 인상은 인간중심의 사고방식, 중생상은 중생이라는 스스로의 타락심, 수자상은 나이가 많아 내가 어른이라는 생각이라고 하였다(『대종경』 변의품 19장). 이는 인도의 사상, 중국의 사상과는 다른 소태산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상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착각들이다. 실체가 없는 것을 있다고 착각하여 거기에 인생 최고의 가치를 두며 집착하거나, 그것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더구나 물질이 개벽됨에 따라 우리의 착각과 집착은 더 심해진다. 물질혁명의 풍요로움 속에 우리의 정신은 그 힘을 잃고 있다. 머지않아 가상현실 세상에도 집착하는 우리를 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상에서 벗어나라’, ‘착각하지 말라’고 외치는 『금강경』의 지혜가 더욱 필요한 것은 아닐까? 나는 어떤 상에 특히 집착하고 어떤 주견을 고집하며 살고 있는지 되돌아봐야겠다.

/영산선학대학교

[2022년 3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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