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민소연 기자] 카카오톡으로 대표되는 메신저의 시대, 손가락은 우리 몸 중 가장 바빴다. ‘최고!’ 할 때나 쓸 줄 알았던 엄지가 하루 종일 열일했다. 듣는 귀 대신 메시지를 읽는 눈도 마찬가지, 입과 귀였던 소통의 부위가 손가락과 눈으로 옮겨간 것이었다. 이제는 손가락이 소통의 왕관을 내준다. 다음 타자는 도로 입이다. 다시, 말의 시대다.

페이스톡이 익숙해질 무렵 코로나19가 도래했다. 비대면은 필수가 됐고, ZOOM이 메신저 천하를 통일했다. 영상통화로 안부를 전하고 줌으로 수업을 듣는다. 애초에 스마트폰 카메라는 추억 남기기가 아닌 소통용이었나 싶다. 

비대면시대, 얼굴을 마주하긴 해도 카메라 너머다. 몸짓이나 말투와 같은 비언어적 의사소통은 거의 불가능하다. <대통령의 글쓰기>의 저자 강원국 작가는 말한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시대는 지났다. 이제 개떡은 개떡이다.”

그는 이렇게도 말한다. “비대면 시대는 강의하는 사람과 강의 듣는 사람으로만 나뉜다. 소속보다는 개인이 우세해진다. 소속이 없어지면 나의 역량 자체에 집중된다. 소속되어 있을 때 중요한 것은 읽기와 듣기였다. 허나 내가 주인인 사회에서는 말하기가 중요하다.”

이제는 어떤 정보든 보고 듣기를 원한다. 유튜버가 어엿한 장래희망 0순위인 이때, 그들의 최고 무기는 ‘말’이다. 말의 힘이 인기도 되고 돈도 된다. 세상도 말 잘하는 사람을 찾아 높여 쓴다. 지식과 교양, 전문성과 창의력, 눈치와 센스까지도 말 몇 마디면 훤히 보인다. 말이 이름이요 명함이다. 말 잘하는 사람이 좋으니, 나도 말을 잘하고 싶다. 모두가 입을 벌리는, 적어도 벌리고 싶은 때다. 

그렇다면 어느 시대든 찰떡같이 맞아드는 우리 공부도 생각해보자. 모든 과목이 중요하지만 지금은 말로 훈련해보는 거다. 수십년 공부해도 일기가 여태 어려운 교도들을 위해 회화를 선물하자. 원고를 준비해 줄줄 읽는 신앙수행담 말고, 대담이나 토크콘서트 형식의 말잔치를 열어보자. 

글은 고민돼도 말은 나오고, 발표는 어려워도 대화는 쉬울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 감동이나 카리스마를 느낄 때, 그것은 보통 말에서 온다. 말 끝에 어려있는 날것의 진실함이 공감포인트요 눈물버튼이기 때문이다. 

봄꽃마냥 현장교화가 기지개를 편다. 그간 숨죽고 굳어진 신앙, 말로 되살려보자. 누구나 내 말 들어주는 사람을 좋아하고, 내 외로움 내려놓을 곳을 찾는다. 처음부터 회화가 어렵다면 교당와서 그저 몇 마디라도 얘기하게 하자. 말의 시대 말의 교화, 입 떼는 게 시작이다. ‘말의 시대, 공부도 역시 ‘말’입니다.’

[2022년 3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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