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만 교무 “교단 순수성 지켜낸 기도터” 강조

[원불교신문=유원경 기자] 원기25년(1940)은 일본 개국 2천6백년 기념의 해였다. 조선총독부는 조선 내의 불교를 모두 친일단체로 만들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당시 불법연구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총독부는 ‘말로만 복종하며 지도에 따르겠다고 하지 말고 그럴만한 실적을 보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소태산 대종사에게 일본을 방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일왕을 만나고 신사참배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선총독부의 지시는 피할 도리가 없었다. 가서는 안될 일이나 가지 않겠다고 거부하면 결과는 뻔한 일이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일본행을 위해 부산을 내려가 초량교당에 들렀다. 하지만 소태산은 안과에 다니며 안질 치료를 핑계로 차일피일 날짜를 미루고 있었다. 얼마 후 전음광이 내려와 “일본방문은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고 전했다. 그렇게 성화같이 요구하던 일본 방문을 그들 스스로 취소하게 된 것이다. 그 다음 해에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원기24년 소태산 대종사가 초량교당을 방문했다. 
원기24년 소태산 대종사가 초량교당을 방문했다. 

소태산 대종사 열반 후 정산종사가 법통을 이어 종법사로 재임 시에는 조선총독부가 불교의 황도화(皇道化)라는 정책을 강행했다. 『정전』과 『회규』까지 그들의 국체 국책에 맞도록 개편 시행할 것을 강요했다. 

정산종사는 총무부장을 전격 교체시키고, 지방 순회를 빙자해 부산으로 내려와 초량교당에 머물렀다. 또한 법당에 ‘사은상생지 삼보정위소(四恩相生地 三寶定位所)’라 써 붙이고 시국의 안정을 위해 기도했다. 이후 8월 15일 정산종사는 부산 일정을 대강 마무리 짓고 오던 도중 대전역에서 해방 소식을 듣게 됐다.

이 두 일화를 이성택 원로교무는 “소태산 대종사와 정산종사가 교단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말했다. 덧붙여 “만약 일왕을 만나고, 신사참배를 했다면, 그리고 불교황도화를 했다면 우리 교단은 친일을 했다는 오명을 썼을 것이다”고 설명했다.

당시 초량교당의 역사가 어려 있는 초량1동 179번지(현주소)는 교당이 지금의 터로 이전하면서 매각해 현재 사찰이 자리 잡고 있다. 이성만 초량교당 교무는 현재 소태산 대종사와 정산종사의 경륜이 서린 부지를 매입하기 위해 1천일 기도에 들어갔다. 교단사적으로 초기 초량교당터는 소태산 대종사가 영남교화를 시작했던 역사와 일정 탄압 속에서 교단의 순수성을 지켜냈던 곳이며, 정산종사가 시국의 안정을 위해 기도했던 터이기에 그만큼 교단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이 교무는 “소태산 대종사가 교리를 설하고 교화의 문을 열었으며, 정산종사가 시국의 안정을 위해 기도 올린 그 터를 우리가 잊어서는 안된다”며 “옛 초량교당 터를 매입하기 위해 기도를 시작했다. 많은 재가출가 교도들이 합력해 주기를 부탁한다”고 말했다.
영남교화의 초기 역사가 서려 있는 초량교당은 하단성적지로부터 시작해 남부민지부, 그 뒤를 이어 생겨난 곳이며 소태산의 성혼이 어린 성적지다.

[2022년 3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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