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상호 교정원장이 중앙 일간지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지난해 일어난 전서 사태에 유감을 표했다. 그리고 이를 기점으로 새로운 원불교를 위한 교단혁신을 부르짖었다.

어느 새 1년이 지나가지만, 전서 사태의 후유증은 아직도 진행형처럼 올가미가 되어 발목을 잡는다. 새로운 일들은 혹 두려움에 신중이란 이름으로 지지부진하고, 모두가 혁신을 말하지만 진정성을 찾아보기도 쉽지 않다. 발등의 불은 호들갑으로만 은밀하게 희롱의 소재가 되었다.

왜 그럴까?

원불교에는 나쁜 관행이 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란 식의 덮어두기다. 용서하고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포용이 가끔 사건의 진실을 유야무야 묻어버린다. 용두사미처럼 호들갑은 떨었으나, 사건이 정리된 것도 아니고 안 된 것도 아닌 상태로 덮어두기에, 약삭빠른 자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기도 한다. 그러기에 잊을 만하면 꺼내 요긴한 안주거리로 삼는다. 매듭이 없다는 것이다. 

전서사태 역시 사건의 결론이 없다. 아니, 결론은 있었지만 아는 사람만 아는 것으로 쉬쉬하고 있기에 명명백백하지가 않다. 그저 ‘누가 징계를 받았다더라’ 하는 정도에서 대충 마무리가 된 느낌이다. 그러니 누군가 이것을 꺼내어 물을 때마다 죄지은 사람마냥 꿈쩍 놀라며 눈치 보기에 바쁘다. 적당히 넘어가자는 눈빛들은 호소에 가깝다. 교단 100년 동안 다 같이 법형제로 살아왔으니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사실 전서 사태의 경우, 당사자들이 그리고 당시 책임 있는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먼저 나서 사과를 하고 책임을 감수했더라면 사태로까지 확대될 일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이런 일은 요원하게 되었다. 일파만파, 수위단원 전원이 사퇴하고, 새로운 후보추천 과정에서 개인 일탈로 인한 부정선거가 일어났다. 하지만 진실이 제대로 밝혀진 것은 없다. 이 역시, 아는 사람만 아는 것으로 징계가 이뤄지고 덮어버렸다. 그래서 또 깜깜이다. 이를 조정하는 나쁜 손은 ‘잘못된 제도’와 관행이다.

이렇게 홍역을 치렀으면 이제 좀 명명백백 하자. 잘못한 사람이 징계를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실수는 사과를 해야 마무리 된다. 이런 과정이 생략되니 10년 전, 20년 전 사건이 빌미가 되어 현재의 발목을 잡는 것이다. 감춰진 진실은 일순간 잊혀질수 있지만 결국 더 큰 불신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우리가 진리를 구하는 것은 세상을 명명백백히 보자는 것에 다름이 없지 않은가. 

사람을 감싸고 용서하며 포용하는 일은 종교가에서 적극 권장할 일이다. 하지만 진실이 명명백백하지 않으면 그 어떤 포용도 가치를 잃는다. 오히려 이때의 포용은 책임을 방기하는 수단이고 가식일 뿐이다. 그러기에 명명백백하지 않으면 혁신도 없다.

[2022년 4월 11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