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광 명예교수
김혜광 명예교수

[원불교신문=김혜광 명예교수] 성·속과 시·공간을 떠나 어느 사회든 교육은 강조됐다. 그 이유는 교육이 개인은 물론이요, 국가와 사회 발전의 기반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육에 직간접적인 투자를 많이 해왔다. 

그러나 무엇보다, 교육이 사회· 경제적 지위의 획득 수단으로 역할을 해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옛날 과거시험도 순기능과 입신출세의 역할을 했고, 오늘날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했다는 명문 학교도 알고 보면 인간다운 인간을 길러내기보다는 입시경쟁을 잘한 것이라는 평가임을 부인할 수 없다. 교육을 중시해 온 우리의 유전자 속에는 인간다운 사람, 된 사람을 제대로 길러낸 학교라는 이름보다는 현실적으로 사회·경제적 지위 획득에 성패를 거는 문화가 지배해 왔다.

문제는 왜 종교에서 이런 일반 사회의 학교 교육, 즉 교육의 영역에 관심을 표방하는가이다. 종교의 본령인 영성을 계발하는 일이 교육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겉으로 내세우는 명분이야 공감이 간다. 

그러나 우리나라 대부분의 종교계 학교나 종교에서 교육에 관심 갖는 이면을 들여다보면 인간다운 인간이나 된 사람보다는 교세 확장을 위한 수단으로 삼았던 것은 아닐까?
이제 종교가 교육, 즉 학교 교육에 관심을 둔다면 그것이 누구를 위해, 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고민할 때가 됐다. 이에 답하지 않는다면 일반 사회와 별반 다름 없는 교육이나 학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원불교에서는 과연 교육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를 원불교적 교육이라고 해도 좋다. 그것은 이웃 종교나 적어도 일반 사회의 그것과 무엇이 같고 달라야 할까? 굳이 종교교육이라는 이름이 아니어도 원불교 교육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은 교립학교의 아이덴티티 확립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교법의 사회구현을 위해서도 그렇다.

소태산 대종사는 일반 사회와 전혀 다른, 종교만의 독특한 교육을 구상했을까? 만일 그랬다면 무엇일까? 그리고 원불교 교리 속에 그려진 교육의 모습은 무엇일까? 

『정전』 무시선법에 보면 “응하여도 주한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닦는 법만 자상히 알고 보면 농부도, 공장도 점원도, 공무원도 처소에 구애 없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했다. 그 밖에 “시대를 따라 학문을 준비하라”고 했고, “직업 없이 놀고 먹는 것을 폐풍이다”고 했으며, “영육을 쌍전하라”고도 했다. “도학으로 바탕을 삼고 과학으로 사용하는 교육을 겸전하라”는 말도 했다. 

이렇게 보면 ‘원불교의 가르침대로 하면 그것이 원불교다운 교육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원불교에서 말하는 도학, 즉 마음공부가 바탕 된 과학교육, 직업교육, 사회교육일 때 그것이 원불교적 교육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공교육에서 도학, 마음공부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접목할 것인가에 있다. 적어도 일반 사회인들에게도 공유할 수 있고 나아가 감명을 줄 수 있는 원불교적인 학교문화를 창출해나가야 한다. 겉으로 보이는 건축양식, 제도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정서, 분위기까지 섬세하게 원불교적인 교육문화를 발굴·정착시켜 나가는 노력 없이 그저 교리만을 강조하게 되면 그것은 소태산 대종사의 본의가 아니며 또 다른 불협화음만 낼 뿐이다. 

그러므로 원불교적인 교육은 구호를 넘어 교육문화 창출을 통해 혼이 살아 숨쉬도록 실현해나가야 한다.

[2022년 4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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