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계가 비상이다.

코로나19 시국을 지나오면서 종교 신자들의 급격한 감소가 예상된다. 더구나 위기 때마다 종교가 코로나 확산의 주범이 되면서 불신의 골은 더 깊어졌다. 하지만, 흐른 시간들을 되돌려보면 종교에 대한 무관심은 이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예견되어 있었다. 자본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삶의 풍요는 ‘종교가 여가를 이기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고, 더불어 종교의 상업화와 종교인들의 부도덕(몰염치)에 실망한 사람이 늘어나면서 사회가 오히려 종교를 걱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특히 젊은이들의 학습에 대한 과도한 강요와 놀거리의 다양화는 이중삼중으로 종교와 멀어지는 촉발점이 되었다. 그러기에 ‘코로나 이전으로의 교화회복’은 첩첩 산중처럼 놓여 힘겹다.

자본사회의 환경변화는 전무출신 정신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예전에는 교당에서 교화하는 교무만이 전부인 걸로 알던 시대가 있었다. 교무라면 교당교화는 당연한 걸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교단이 확장되면서 교무들의 선호도가 안정된 경제가 보장되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어 우려된다. 교화에 대한 강한 사명감이 퇴색된다면 이보다 큰 낭패는 없다. 교단은 교화를 자양분으로 하여 성장한다. 곧 원불교가 지향하는 평화 안락한 낙원세상은 교화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교무들의 우선 지망이 월급이 보장되는 곳이고, 차선책이 교당교화가 된다면 이는 실로 심각하지 않을 수 없다. 즉, 많은 교무들이 기관으로의 인재유출에 우려를 표하면서도 동시에 부러움의 시선을 쉽게 거두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현상이 다수인지는 알 수 없다.

사실, 교화현장 교무들의 근무여건이 열악하지 않다고는 할 수 없다. 교당운영 규칙대로 한다면 새벽부터 저녁 늦은 시간까지 도량상규를 지켜야 하고, 늘 긴장할 수밖에 없는 근무환경은 하루 24시간이 부족할 정도다. 거기에 교당유지를 도맡아야 하고, 법회를 준비해야 하며, 온갖 서류철과 행정업무도 빠트릴 수 없고, 교도들과의 수시 상담은 은근 스트레스로 다가올 수 있다. 이웃종교의 경우, 성직자들에 대한 심리상담이 인기를 끄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세대 간 갈등도 만만찮다.

이걸 교화 사명감으로만 각자에게 떠넘기기에는 상대적 가혹성이 발생한다. “교무도 사람이다”는 말에 아픔과 울림이 크게 다가오는 이유다. 사람은 누구나 편안함을 추구하고 넉넉함을 즐겨한다. 그럼에도 그 자리를 지켜내는 교무들이 있어 오늘의 원불교가 존재한다. 사람농사라 할 수 있는 교당 교화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지금 교단에서 그 세정을 누가 알아줄까?

지금은 중앙총부가 일선 교당을 생각할 때다. 교화현장을 지키며 절절하게 애를 태우는 교무들의 그 마음을 존중하는 교단이어야 교화가 살아난다.

[2022년 5월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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