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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의 가장 북쪽
간성교당, 5월 25일 봉불

간성교당은 지상2층 신축건물에 대각전 생활관 사무실 영모실 등을 갖췄다.
간성교당은 지상2층 신축건물에 대각전 생활관 사무실 영모실 등을 갖췄다.

[원불교신문=민소연 기자] 통일의 그날 북쪽에서 내려올 이들을 가장 먼저 맞이할 최북단 교당, 강원도 고성에 위치한 간성교당이 5월 25일 봉불한다. 원기104년에 공사완료해 이듬해 등기를 냈으나 그러고도 꼬박 2년을 기다렸다. 부침 많아 더디고 한참 걸린 봉불식, 그러나 이 세월은 오히려 금강의 주인들을 살찌우는 시간이 됐다.

“함 선생 고향이 바로 간성입니다”
‘여기서부터 금강산’, ‘금강산까지 18km’ 안내가 곳곳에서 맞아주는 강원도 고성군. 흔히 여기저기서 ‘맑은 날은 북한까지 보인다’고들 하지만 고성은 급이 다르다. 흐린날도 육안으로 보이는 북녘땅. 이 때문일까, 고성은 어떤 그리움과 또 다른 긴장이 깊게 배어있다.

5월 25일 오래 기다려온 봉불식에는 나상호 교정원장을 비롯, 장경진 원로교무와 최준명 요진건설산업(주)회장, 강원교구와 신촌교당 등이 함께할 예정이다. 
 

간성땅의 첫 법신불 봉안은 원기73년 9월 6일. 그리고 이듬해 선교소가 설립됐다. 누구라도 간절히 바랐지만 엄두를 못냈던 간성교당의 연원은 서울교구 신촌교당이다. 교당 탄생에 얽힌 이야기 중에서도 간성교당은 퍽 재미있다.

원기72년 어느날, 당시 신촌교당 장경진 교무는 “강원도를 돌아보니, 고성에 교당이 있어야겠더라. 더구나 금강산 유점사에 있던 53불 안착지가 바로 간성이다. 개성교당을 다시 이뤄야 할 우리에게 통일의 길목 교당이 없으니 어쩌면 좋을까”라며 아쉬워했다. 법회를 마치자마자 한 교도가 조용히 다가왔다. “교무님, 이게 인연인가 봅니다. 함 선생 고향이 바로 간성입니다. 간성교당, 저희가 힘껏 해보겠습니다.” 바로 조도운행 교도로, 부군인 함노봉(본명 승호) 교도는 전 대구지법 판사였다. 

법명 ‘함노봉’이 간성의 명산 ‘향로봉’과 발음이 같아 좋아했다던 함 교도. 아내 조도운행 교도와 아들 함현직 교도, 거기에 이은숙, 장혜진, 박순관, 박상조화, 박세인 교도가 뜻을 더해 간성교당을 창립했다. 허나 수복지역 특성상 교화는 쉽지 않았고, 간성교당은 이를 400명의 한방 무료진료를 비롯, 양로원·고아원 봉사 등으로 타개해갔다.
 

어떻게 금강의 주인을 키워낼까
그 후로 35년, 한반도 평화는 얼어붙었다가도 녹았고 덥혀지다가도 급히 싸늘해졌다. 간성교당도 남북관계처럼 굴곡이 이어졌고, 그 가운데서도 꿋꿋하게 교화를 이어갔다. 

원기90년대 들어서는 군교화 훈풍을 타고 22사단 철책부대를 비롯한 장병들도 오갔다. 어찌보면 고향에서 가장 멀리 있으면서 늘 긴장 속에 살아야 하는 곳이었다. 군인들에게 원불교는 쉼이었고 안식처였다. 많지 않은 교도들도 군인들을 살뜰히 챙겼다. 교당에 오면 늘 따뜻하게 환영했고 늘 배부르고 마음부르게 챙겼다. 다만, 이로 인한 딜레마도 엄연히 존재했다.

원기104년 부임한 김석기 교무는 부임 첫 달을 이렇게 돌아본다.

“교도들 서넛이 일요일 군인들 뒤쪽에 동그마니 앉아계셨다. 심지어 법회도 다 못보고 서둘러 앞치마를 입었다. 수십명 간식준비하는 게 일이었고, 교당 오는 이유였다.”

물론 그것은 봉공이자 교화였다. 허나 교당 주인으로 성장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군교화와 일반교화 모두를 다 챙기기에는 현실적인 한계도 컸다. 과연 ‘금강의 주인’을 어떻게 키울까 고민하던 그, 그런데 뜻밖의 소식이 밀려들었다.
 

“고성 등지에 큰 산불이 나면서 원불교 밥차가 달려왔다. 교단이 힘을 합쳐 고성군 천진초등학교 대피소에서 밥을 지어 나눴다. 그로 인해 교당 신축이 속도를 내게 됐다.”

연원인 신촌교당의 바다같은 신성은 세월을 흘러 최준명 요진건설회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최준명 회장은 김석기 교무를 만난 자리에서 에두르지도 않고 말했다.

“군교화도 좋지만, 뿌리 내린 교도가 있어야 한다. 집 짓는 건 내가 하겠다. 교화 불모지에서 쉽지 않겠지만, 교도 40명 약속해달라.”

덜컥 40명을 약속하고 보니 까마득했다. 허나 김 교무에게 무기가 있었으니 바로 양양교당에서의 세월이었다. 이곳에서의 교화는 결국 삶과 함께여야 했다. 말하자면 ‘체험 삶의 현장’이 영동, 군사, 관광지역의 공식이었다. 
 

영동, 군사, 관광지역의 교화공식
마침 코로나19로 군법회가 막히고 법회마저 조심스러웠다. 허나 금강의 주인 양성 프로젝트에는 오히려 좋았다. 어차피 교도 하나 하나의 삶으로 들어가야 했다. 바구니를 들고 교도들과 나물을 캐러 다녔다. 항구에서 교도 배가 들어오면 생선을 이고 날랐다. 교도 식당에서 밥 먹고 청소했다. 틈틈이 직접 들러 인사를 전했다. 그렇게 2년, 코로나19가 계속되고 봉불이 늦어지는 동안 간성교당은 금강의 주인들을 산에서 바다에서 캐냈다. 이제 그 북쪽의 교당에서 20명의 주인들이 자라고 있다. “이제 반 했으니 거리두기 끝나면 나머지를 해내, 약속을 꼭 지키겠다”는 다짐이다.

일반법회는 화요일 저녁 7시, 매일 아침 좌선 및 선, 정진기도에도 발길이 이어진다. 군인들 모여드는 일요법회는 이내 재개될 것이다. 1:1로 알음알음 하던 공부방도, 회장단도 봉불 이후 꾸려볼 작정이다. 가장 북쪽의 통일 전진기지 강원교구 간성교당. 이제는 부쩍 성장한 주인들이 함께 걸으니, 여기서부터 금강산, 금강에서의 결복이 머지 않았다.

[2022년 5월 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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