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 출입했던 뒷문, 흔적 그대로

[원불교신문=유원경 기자] 교단 초창기 시절부터 100여 년의 세월을 지켜온 익산성지 대각전은 소태산 대종사가 일제로부터 핍박받았던 역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정산종사가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고달픈 세월을 지냈던 일화가 전해지고 있는 곳이다.

익산성지 대각전은 불단 양옆으로 방이 하나씩 있으며, 이 두 방 뒤편으로 각각의 출입문이 하나씩 있다. 한쪽 방은 불법연구회가 예회 등의 모임을 가질 때 일본 경찰들이 감시하던 공간이고, 다른 한쪽 방은 소태산 대종사가 예회 시 이 문을 통해 대각전에 들었던 출입 공간이다. 
 

 대각전 출입문.
 대각전 출입문.

1937년 일제는 제국주의 전쟁을 찬미하고 일본 파시즘을 내면화한 황도불교를 내세우면서 불법연구회에 황도불교화를 명했다. 그 정책 중 하나가 예회를 하거나 단체 모임을 갖게 될 때 강제적으로 ‘황국신민서사’를 외우게 하며 일왕에 대한 맹세를 강요한 것이다. 예회 때마다 일본경찰들의 감시가 있었기에 ‘황국신민서사’를 식순에 넣어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소태산은 예회 참석 시 황국신민서사 낭독 시간이 지나면 불단 뒤쪽 문을 통해 대각전에 들어섰다. 경찰들의 감시로 어쩔 수 없이 맹세문을 식순에 넣게 됐지만, 일부러 황국신민서사의 맹세 식순을 피했다. 불법연구회가 일제에게 비협조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황도불교화에 굽히지 않고자 했던 소태산의 방편이 아닐까 생각된다. 지금도 대각전 뒤편에는 당시 소태산이 출입했던 문이 그대로 남아있다. 
 

대각전 뒷편 두 방의 출입문.
대각전 뒷편 두 방의 출입문.

해방 후 6.25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총부 간부들이 정산종사에게 “교단의 영수이시니 위급할 때 피난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며 피난길을 권했다. 정산종사는 “총부는 내가 지킬 터이니 너희들이나 갈 데가 있으면 가 보아라”고 말했다. 정산종사는 교역자들과 함께 총부에 남아 그곳을 지켰고, 원명부를 포함한 주요 물품과 문서 등을 대각전 천정에 감췄다.

북한군이 총부에 들어왔을 때, 그들은 총부 정문의 간판을 떼고 그들의 부대 간판을 걸며 호남주둔군본부로 삼았다. 모든 시설과 건물들은 북한군이 사용하게 됐고, 정산종사와 남은 교역자들은 대각전으로 쫓겨났다. 북한군들이 대각전을 순순히 내줬던 이유는 공중에서 전투기의 표적이 될만한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정산종사는 대각전(불단을 기준으로) 동쪽방을 사용했고, 나머지 인원들은 대각전과 정미소(현재 총부주차장)에서 생활했다.

이후 북한군은 물러나면서 총부를 불태우고 가자는 의견을 냈다. 하지만 부대장이 “건물들의 재목이 좋은 것이 아니다. 부르주아가 인민의 재산을 착취해서 만든 재산이 아니다. 인민의 재산이니 불태울 것이 없다”고 말해 위기를 모면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북한군이 물러났을 때 다시 총부 정문에 원불교 간판을 걸자고 했다. 그때 정산종사는 “그대로 두라”고 했다. 며칠 후 국군과 경찰이 큰 피해가 없는 총부를 보면서 공산군에 대한 협조를 의심했으나, 총부 간판이 대각전 뒤편에 걸려있는 것을 보고 그 의심을 풀었다고 한다.

[2022년 5월 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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