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법 교무
김지법 교무

[원불교신문=김지법 교무] 장자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가 재담 가득한 이야기꾼인가 하다가, 짐짓 알 듯 모를 듯 깊은 철학자인가 싶고, 얼핏 저 너머를 읊조리는 시인인 듯하다. 이 세상에 도저히 있을 것 같지 않은 신인(神人)을 묘사하며, 마치 ‘뜰 앞의 잣나무’처럼 말을 넘어선 말을 툭 던진다.

“해와 달과 나란히 가고, 온 우주의 시간과 공간을 두루 순회하라. 그것들의 빈틈없는 결합을 연출해내고, 그것들의 격렬한 소란에는 초연하라. 각자가 서로에게 하인인 듯 서로를 존경하자. 보통 사람들은 호들갑을 떨며 안달하지만, 성인은 얼간이자 굼벵이다. 만년을 지나면서 가지런히 정렬되어, 일체성, 전체성, 단순성을 이루리라. 만물은 모두 본래 모습 그대로 존재하고, 본래 모습 그대로 총체성을 이룬다.”

보이지 않는 길(道)을 따라 모든 것은 노닌다. 저 먼 허공의 우주도 하나하나 길 아님이 없다. 해와 달, 그리고 나, 모두가 우주의 먼지로, 어느 하나 우주와 떨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우주 그 자체와 둘이 아니다. 저 별의 먼지가 나의 몸이 되고, 그 작용으로 생긴 마음 하나가 저 먼 별의 빛이 된다. 오늘의 나는 내일의 별이며, 어제의 나는 오늘의 별이다.

이것과 저것, 이 둘을 나누는 것부터 이미 참이 아니다. 무수히 많은 파도가 제각기 넘실거리지만, 모두가 한 덩이의 바다이다. 언제나 찰나의 순간, 영원한 온 우주가 담긴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생각 속에서만 진실이다. 찰나의 순간, 현재라고 생각한 순간, 이미 사라지고 없다. 오직 현재는 지금 그대로 모든 것을 담을 뿐이다. 무엇이든 만들어내는 생각 없이. 몸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본다면, 아마도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길이 떠오르리라.

삶과 죽음, 무엇이 이를 가르는가.

우리는 꿈을 꾼다. 꿈을 꾸는 동안에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연회도 즐기고, 사냥도 즐기고, 맹수에 쫓기어 두려움에 떨고, 피를 흘리며 죽어가기도 한다. 꿈에서 깨어나서야 꿈인 줄 알게 된다.

장자는 문득 이 삶이 꿈이 아닐까 질문을 던진다. 우주의 작은 파도 한 조각, 먼지 한 톨, 바람 따라 물결 따라 꿈을 꾼다. ‘나’로 태어나 수많은 경험을 하고, 생각을 하고, 병들고 늙고, 오늘도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나’는 누구인가. 문득 든 한 생각, 진실이라 생각한 이 모든 것이 한바탕 꿈이었을까. 뺨을 꼬집어봐도 분명 아픈데, 정말 꿈이라고? 꿈을 꾸고도 깨어나면 어떤 날엔 선명하게, 또 다른 날엔 흐릿하게 기억난다. 장자는 이제 그 꿈에서 깨어나라 말한다. 꿈이 꿈인 줄 어떻게 알까. 너무나 완벽하기에, 꿈은 이미 한 회상(會上)이다. 꿈을 깨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다. 삶과 죽음, 만약 삶이 꿈이라면, 죽음은 깨어남이리라. 지금의 삶의 ‘나’는 꿈의 주인공일 뿐, ‘참나’는 항상 여여(如如)하다. 그래서 장자에게 죽음은 깨어나는 기쁨이리라.

/3대결산총회준비위

[2022년 5월 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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