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산 한길량 원로교무
길산 한길량 원로교무

[원불교신문=이현천 기자] 영광군 백수면 천정리에서 태어나 언덕을 넘어 다니던 소년은 원불교를 내 집처럼 여기고 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두 마음 없이 출가의 길을 나섰다. 주변 인연이 모두 불연이었음은 두고두고 감사할 일로 남는다.

노구의 나이에도 일평생 일과로 다져온 정갈함과 은은한 소박함이 느껴지는 길산 한길량 원로교무(吉山 韓吉良·85). 그는 중앙총부에서 2년, 원광대학교에서 30년, 부송종합사회복지관에서 7년 동안 근무하며 대학과 원불교 사회복지의 발전, 교단의 화합·상생을 위해 노력해왔다. 최근에는 그동안 발표한 책과 일생을 요약한 참회 회고록을 정리 중이다.
 

‘소통과 화합’으로 일궈낸 교역생활
한길량 원로교무의 교역생활은 ‘소통과 화합’으로 요약된다. 그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선진과 인물들은 그에게 있어 문답과 화합의 대상이었다.
“대학 교무회장(원기77년)을 맡고 있을 때, 예산 이철행 종사님이 교정원장님이었어요. 당시 ‘보화당제약사’로 고민이 많으셨죠.” 존폐위기에 있는 제약사를 재건하지 않으면 그 허가증을 잃고, 다시 취득할 수 없는 상황. 당시 대학도 어려움이 있었다. 대학 교무회의 화두인 총장단일화와 경제 활성화 문제로 ‘어떻게 자립경제로 총부와 연결할 수 있는가’를 영산성지에서 1박 2일간 논의했을 정도다. 

교무회 대표로서 회의한 결과를 가지고 예산 교정원장을 찾았을 때, 예산종사는 “보화당제약사를 대학과 총부가 손잡고 일으켜보면 어떻겠느냐?”며 “그것을 상의해보면 좋겠네”라고 했다. 넌지시 건넨 중개 요청이었다.

그는 대학과 총부가 함께 공생하는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문산 김정용 총장을 찾아가 예산종사의 제안과 대학교무회 회의 내용을 보고했고, ‘보화당제약사’를 ‘원광제약’으로 재건하는 일을 성사시켰다.

대학과 총부의 화합을 고민한 일은 또 있다. 중앙총부 공회당에서 시작한 유일학림이 초급대학이 되면서 지금의 대학 자리로 옮긴 후, 길 하나 사이로 인해 간극이 생긴다는 우려가 있었다. 이에 총부와 대학이 하나되기 위한 운동의 일환으로 ‘한울안 잔치’를 열기로 결정이 됐다. 총부에서는 효산 조정근 교정원장이, 학교에서는 여산 류기현 교무회장이 잔치머리장을 맡았다.

“걸판지게 했어요. 총부, 대학, 기숙사, 중앙교구까지 다 함께 원광대학교 운동장에서 경품도 뽑고… 프로그램이 다채로웠지요. 목말을 태우는 게임이 있었는데, 상산 박장식 종사님이 참 좋아하셨어요. 비디오를 찍어놨으면 좋았을텐데…”라며 당시를 회상하는 그의 표정이 아이처럼 환하다. 하지만 5년간 이어진 ‘한울안 잔치’가 계속 이어지지 못한 점은 못내 아쉽다.
 

‘결심’ 아니라 ‘자연스러운 길’로 들어선 출가
교역생활 중 만난 인연 모두 문답과 화합 대상
중앙총부에서 선진들 삶보며 신근의 뿌리 형성

새로운 세상 알게 된 복지계 근무
학교에서 정년을 맞고 순교감으로 교화현장에 손을 넣어주던 그는 부송종합사회복지관으로 부임한다. “제가 거기서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됐어요.” 사실 그는 오랜 기간 학교와 총부 일대에 지내며 취약계층에 대한 실감을 하지 못했었다. 그러다 1,612세대의 영구임대단지에 있는 복지관에 부임하면서 취약계층과 복지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됐다. “너무 열악했어요. 주거환경도 복지관도 초창이라 상황이 어려웠죠.” 그는 열악한 환경 개선을 위해 월급을 반납해 복지관 환경 보수와 프로그램 개발에 전력했다. 
“제가 직원들을 많이 귀찮게 했죠. 복지관에 손 안댄 곳이 없어요.” 이어 교역생활 속에 맺어진 인연들을 최대한 활용해 아이들을 위한 공간마련에도 주력했다. 어린이도서관·어린이문화복지센터 조성과 노인대학·여성대학·무료급식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정성스럽게 진행한 것이다. 국가나 교단의 지원이 넉넉하지 않을 때라 힘들었을 텐데도 “아이들이 그냥 돌아다니는 게 눈에 밟혀 여기저기 손을 뻗어 어린이도서관을 만들었고, 장애인과 노약자를 위해 엘리베이터 설치도 했다”며 당시를 겸손히 표현한다. 그 모습에 자비훈풍이 담겼다.
 

우연 자연 속 느낀 깊은 불연
어릴 적 영산성지 옆에 살았던 한 원로교무는 “나이를 먹고 보니 내 불연이 참 지중하다”고 말문을 열었다. “묘하게 초등학교 때 친한 친구들이 다 구인선진들 손자였어요. 그러다 보니 친구랑 놀기 위해 영산이 성지인 줄도 모르고 대각터에 많이 놀러 갔죠”
정관평(당시 갯벌)에 게를 잡으러 갔다가 비가 와 수위가 높아진 탓에 노루목 다리를 건너지 못해 집에 가지 못한 적도 있고, 소태산 대종사가 대각한 초막에서 잠을 잔 적도 있다는 그. “소태산 대종사께서 깨달은 집에서 자본 사람은 몇 없을 것”이라며 밝은 미소로 회고했다. “저로서는 일숙각(一宿覺)이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요.”

그에게 출가는 ‘결심’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길’이었다. “이미 원불교가 내 집이고, 다른 생각이 없었다”는 것. 그렇게 법산 이백철 종사를 입교연원으로, 중산 정광훈 대봉도를 출가연원으로 간사 근무를 시작했다. 총부 산업부 구매원 역할을 맡아 총부·조실·구내 및 사가 사모님들의 심부름을 했다.

“정산종사님 식사 때가 되면 금강원에 있던 육타원 이동진화 종사와 용타원 서대인 종사가 나오셔서 진지상을 점검하셨어요. 어른이 식사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살피신 후 별미 심부름을 시키기도 하셨죠. 시내에서 소문난 풍미옥 만둣국을 사다 올린 기억이 납니다. 자전거로 부지런히 달려 따뜻한 상태로 오면, ‘비포장도로에 고생했다’고 하셨죠.” 그렇게 총부에서 여러 선진을 보며 자란 그는 그때 신근의 뿌리를 제대로 형성했다.
 

죽기로 나아가면 살길이 생긴다
후진들을 위한 말을 해달라는 요청에 한 원로교무는 먼저 ‘선배로서 후진들을 위해 더 마련해주지 못한 미안함’을 전했다. 격변하는 시대, 탈종교화 시대를 맞이한 종교계의 상황을 언급하며 “우리들이 더 정성스러워져야 한다”고도 말했다. 특히 ‘스스로 이 회상에 나선 대장부로서 큰 역할을 하겠다’는 사명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당부도 더했했다. “‘백척간두 진일보’하는 그런 ‘사명의식’이 필요합니다. 그렇게만 가면 죽을 상황에서도 살길이 생겨요.”

[2022년 5월 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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