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이 둥지를 짓는다는 건 새끼를 키울 시간이 가까웠다는 거다.

어미는 부지런히 지푸라기를 나르거나 잔가지를 물어와 둥지를 짓는다. 아니면 뾰족한 부리로 몇 날 며칠 나무기둥을 쪼아 깊숙한 둥지를 만든다. 그리고 어미가 둥지에 머무는 시간은 알을 품어 새끼가 깨어날 때까지다. 새끼가 둥지를 차지하면 어미들은 부지런히 벌레를 물어와 새끼들의 배를 채운다. 

그리고 새끼들이 날개에 힘을 얻어 또 다른 숲을 찾아 둥지를 떠나면 어미들도 그 둥지를 버리고 떠난다. 미련이나 아쉬움이 없다. 즉, 자기가 머물기 위해 둥지를 짓는 새는 없다. 제비 등 극히 소수의 새들을 제외하면 작년에 사용한 둥지를 재사용하는 경우도 드물다. 이게 새들의 둥지 사용법이다. 

최근 몇 년, 전 세계적으로 부동산 가격이 폭등했다. 사람들이 가장 안전하고 편안하게 머물러야 할 집이 어느 때부턴가 재산증식의 수단이 되면서 빈곤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어느 누군가는 그 집을 가지지 못해서 불행해 하고, 어느 누군가는 무리한 투자로 집의 노예가 되어 불행해 한다. 가족이 함께 머물며 행복해 해야 할 집이 재산으로 인식되었다는 건, 그 집이 욕심으로 채워졌다는 증표다. 그러기에 가족 간에도 욕심의 그물에 갇혀 다툼이 생긴다. 인간의 욕심은 자기의 둥지를 확장하는 것에서 머물지 않고 남의 둥지까지 뺏는 것으로 자랑을 삼으니 그 아비규환이 처절하다.

종교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 종교는 검소에 의지해 진리를 신앙하고, 청빈한 수행을 자랑 삼았다. 가고 오는 것에 자유하기 위해 애쓴 흔적들이 이정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현대 종교로 오면서 종교인들 역시 물질화 되는 것에 익숙해지고, 좋은 둥지에 머무는 것을 자랑으로 여김으로써 종교성이 가난해지기 시작했다. 둥지를 안전한 피난처로 삼음으로써 둥지경쟁이 치열해지고, 어린 새들은 둥지를 만들지 못해 불평불만의 울음소리를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세상이 종교를 걱정하는 소리 역시 흘러넘친다.   

종교 불신이, 종교 위기가 큰 파도가 되어 몰려올 조짐이다. 이는 모든 종교들이 공히 맞닥뜨려야 할 시대적 상황이다. 특히 이것은 작은 종교일수록 더 큰 내상을 입힐 수 있는 요소가 강하다. 그럼에도 자기 둥지 싸움이나 하고 있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러기에 우린, 새들의 둥지 사용법을 통해 기존의 둥지를 버림으로써 새 둥지를 지을 수 있는 이치를 배워야 할 것이다.  

둥지를 떠난다는 건 자유로움을 의미한다. 둥지를 버린다는 건 새 숲으로 가기 위한 결심이다. 새 숲으로 가는 길은 ‘나 그리고 우리’를 버리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나보다도 더 큰 바위를 등에 업고서 날수는 없기 때문이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우리 인생에 영원한 소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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