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니 마음의 안식처가 필요, 신앙에 의지해”
4년째 법회 무결석, 3년째 사경 하며 공부심 챙겨

강도춘 군서교당 전 교도회장
강도춘 군서교당 전 교도회장

[원불교신문=유원경 기자] “춘산님(강도춘 전 교도회장. 원기88년~94년 역임)이 안 계시면 어지간한 일들은 원만히 해결하기가 어렵습니다. 교당 구석구석 손 안 닿는 곳이 없어요. 평소 아무 말씀도 없으시다가 교당에 필요한 일이 있을 때면 직접 나서십니다. 교당 일을 자신의 일로 알고 전무출신처럼 맡아주십니다.” 

안명조 교무(군서교당)는 강도춘 교도를 ‘교당의 큰 주인’이라고 자랑했다. 소소한 작은 일부터 교당의 큰 공사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강 교도의 조력이 있었다. 어느 때는 부직자처럼 또 어느 때는 교당의 큰 어른의 모습으로 교당을 살핀다. 안 교무는 그런 강 교도가 든든하고 늘 감사하다. 
 

“교당일인데 힘 모아야”
교당 앞 밭을 매입해서 주차장을 마련할 때의 일이다. 강 교도는 주차장 매입 때 행정 일을 자처했다. 매입과정이나 용도변경 등 실무적인 일을 진행할 때 군청을 직접 찾아다녔다. 그는 영광 군서지역 농협에 근무할 때 이미 지역에 많은 인연을 맺어뒀고, 또한 행정적 업무에 밝았다. 그로 인해 교당에서 필요한 일들을 조력할 수 있었다.

지반 공사를 진행할 때도 직접 나서서 문제를 해결했다. 교당 주변 부근을 평탄하게 만드는 공사를 해야 하는데, 비스듬한 곳에 흙을 채워 평탄 작업을 하려면 많은 토사가 필요했다. 하지만 근방에서는 많은 토사를 구할 수 있을지 몰라도 모두 토질이 좋지 못한 곳이었다.

“교당 시설을 만드는 일인데, 죽은 흙을 가져와 할 수는 없지요. 우리 밭을 파서 이곳을 메웠습니다. 25톤 트럭으로 100여 대의 흙이 들어갔고, 메우는 시간만 이틀 걸렸습니다” 교당주차장 마련을 위해 자신의 밭을 파낸다는 것이 쉽진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아직 농사일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교당주차장 공사가 마무리될 즈음, 이번에는 교당에 화장실을 새로 짓자는 의견이 나왔다. 주차장 공사를 할 때 함께 뒤편 창고를 화장실로 개조하자는 것이다. 강 교도는 선뜻 천만원을 희사했다. 결코 부유하지 않은 그에게 이는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텐데…. 

“교당에서 필요하다고 하니까 함께 힘을 모아야지요. 그렇게 걱정했었던 일들을 다 마무리해서 이제 홀가분합니다.”
 

강씨 문중에서 공적비 세워
강 교도는 10여 년 전 새마을지도자 대회에서 지역사회발전 공로로 행정안전부장관 표창을 받은 바 있다. 그만큼 그는 주위 인연들이나 단체를 위한 공심이 깊다고 모두에게 인정받는다. 올해 진주 강씨 문중에서는 그의 공적비를 세웠다. 살아생전에 공적비를 세워주는 사례는 흔치 않은 일이다. 보통은 돌아가신 후 추모하며 세워준다. 공적비를 세울 정도이다 보니 그의 덕망과 인품에 대해 얼마나 신뢰를 얻는지 알 수 있었다.

“문중회장으로 활동했습니다. 중시조께서 최초 정착하신 터를 매입하고 복원하는 일을 맡아서 했습니다. 터 매입하는 데 1000만원 정도 기부했고, 정자와 화단 작업을 도맡았죠. 그리고 회장으로 여러 활동을 했지만 문중에서 공적비까지 세워줄 줄은 몰랐어요.”
 

마음 의지할 곳 찾아 교당에
강 교도가 처음 원불교와 인연이 된 때는 원기39년(1954) 도양교당에서 고등공민학교를 운영할 때였다. 당시 정규 중학 교육과정을 마치지 못한 그에게 도양교당의 인연은 가뭄에 단비 같았다. 그토록 바라던 배움의 기회를 얻게 됐다.

군서교당과 인연이 깊어지게 된 계기는 20여 년 전 즈음이었다. 오래도록 몸담았던 농협에서 퇴직하며 복잡한 사회생활에서 어느 정도 자유를 찾을 무렵, 그동안의 일 속에서 강 교도는 많은 피로감을 느꼈다.

“살아보면서 너무 바쁘게 지냈고 사회생활이 너무 힘이 부쳤습니다. 그 시절이야 다들 먹고 살기 힘든 시기 아니었던가요. 특히 농촌은 농협에서 대출받아 농사짓고 사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대출금을 못 갚는 이들에게 그 돈을 달라고 하는 것도 제겐 힘든 일이었죠” 그 같은 은행에서의 생활이 내심 걸려 있었다.

그렇게 퇴임 후 강 교도는 교당에 점점 마음을 붙이게 됐다. “살다 보니 마음의 안식처가 필요하다고 느껴졌죠. 마음이 쉴 곳, 그곳이 교당이었고, 신앙에 의지해 생활하면서 이제는 마음이 좀 편안해졌습니다.” 그 뒤로 그는 교당 일을 조력하면서 보은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다고 한다. 생활에서도 신앙과 수행으로 마음이 평온해지고, 감사 생활 속에서 행복을 찾게 됐다고. 
 

안식처가 되는 교당, 쉼과 행복
강 교도는 4년째 무결석으로 법회에 참석하고 있다. 굳이 법회 날이 아니더라도 교당에 종종 들른다. 그에게는 교당이 집처럼 편안한 곳이기 때문에. 

또한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거동이 불편한 고령의 교도를 차량으로 동행하며 조력한다. 공부심도 강해 매달 상시일기를 빼놓지 않고 기재해 교무의 문답 감정을 받는다. 조석심고도 빠짐없이 올리고, 염불과 경전연마를 유무념 삼아 수양과 연구 시간을 가지며 매일 일기로 체크 한다. 3년 동안 사경 공부도 놓지 않고 있다.

“마음의 위안이 되는 곳이 교당입니다. 제게 교당은 안식처라고 할 수 있지요. 교당에서 소태산 대종사님의 법문을 공부하며, 나 자신을 성찰하는 이 순간이 소중하고 행복합니다.”

강 교도는 지금의 교당 생활이 복을 짓고 마음을 맑히고 있어서 행복하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점차 농촌에 사람들이 줄어들고, 그래서 그만큼 교도가 줄어든다는 것. 그래서 군서교당이 더 많은 교화를 하지 못함이 늘 아쉽다. 하지만 힘닿는 대로 교당 교무를 조력해 교화가 성장할 수 있도록 자기 몫을 하고 싶다는 강 교도.

“군서교당에 젊은 사람들도 많이 나오고 아이들도 많아지면 좋겠네요. 교화가 잘되도록 함께 힘을 모으고 공부하며 다 같이 행복한 생활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2022년 6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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