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종교 상황이 사면초가다.
코로나19가 빚은 비대면의 사회는 급격한 종교위축을 가져왔다. 2년여 가량 이어진 집회금지가 어느새 사람들의 습관을 바꿔놓았다. 더구나 전 지구적 위기상황에서 종교의 역할과 위력이 한계를 드러낸 것도 원인이다. 하지만, 그 이전부터 각 종교 연구자들은 시대에 따른 종교위기를 감지하고 부단히 대책을 내놓기도 했다. 코로나19가 종교위기를 좀 앞당기긴 했지만, 이미 예정된 수순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각 종교마다 비상이다. 특히 젊은 종교인구의 감소폭은 더 급격하다. 학업과 생업의 최일선에서 허덕이는 젊은이들에게 종교의식은 그저 고리타분함의 극치요, 가끔 뉴스로 떠다니는 종교인들의 부도덕과 생계형 선교는 불신으로까지 확대되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사회가 종교를 걱정하는 시대라는 말이 회자되기도 했다. 종교인들 역시 이 말을 자조적으로 뇌는 걸 보면 아예 틀린 말도 아니니 걱정은 깊어진다.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이 종교성에서 아주 돌아선 것은 아니다. 이들의 대화 속에서 ‘힐링’ 혹은 ‘위로’ 등의 언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이들 역시 결은 달리 하나, 종교적 위안에 굶주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이들은 한적한 카페를 찾아가 시간을 보내거나, 명소를 찾아가 인생 샷을 남기며 스스로를 위로하며 위안을 받는다. 이는 곧, 종교가 이들의 마음을 채우는 일에 소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종교의 변화가 가장 무뎠고 느렸다. 물질문명이 변하면서 사회가 변하고, 그 구조 따라 생각이 달라지면서 세대가 변하고, 따라서 사람들의 정서와 생활방식에 변화를 가져왔다. 유사 이래로 사람들의 삶에 가장 긴밀히 관여해왔던 게 종교이지만, 지금 시대에도 좀체 바뀌지 않는 게 종교이고 종교인이다. 이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생활을 통제해 왔던 관념적 선민의식에 물들어, 신격화된 권위를 내려놓기 싫어하는 종교인들의 책임이 클 것이다. 

아마 100여 년 전, 소태산이 부르짖은 불법의 시대화 생활화 대중화는 이러한 요소를 충분히 간파한 산물이지 않을까. 관념적 신(절대자) 중심의 사회에서 인간 중심의 사회로, 허망한 주술의 시대에서 실지 생활 중심의 삶으로, 그리고 각자 각자가 존중 되어 모두가 주체적 삶을 살아가도록 이끌어주는 역할. 소태산은 이미 그 시절, 사람들의 삶이 모이고 거쳐가는 플랫폼으로서의 탈종교적 원불교를 설계했다고도 보아진다. 

이제 종교가 변해야 할 때다. 종교가 우선 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삶이 우선되는 것. 전체성이 무조건 우선이 아니라, 개별적 생명성이 존중 받는 것. ‘다 같이’ 보다는 ‘다 함께’가 인정될 때, 사람들의 마음 속 울림은 더 커질 것이다. 대자연이 산경전이고 대법당인 시절이다. 종교는 어디로 가야할까.

[2022년 6월 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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