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도인·사상가·혁명가들이 모였던 땅
“500년 종사보다 3000년 도통이 더 중요”
네 가지 중요 키워드 ‘바다·교류·실용·계승’

[원불교신문=이현천 기자] 부안은 동학과 서학(천주교), 불교와 원불교, 정통유교와 신 유교가 모두 어우러진 땅이다. 삼국시대부터 영지(靈地), 천부(天府, 하늘이 내린 땅)로, 보찰(寶刹)이 많은 곳으로 유명해 수많은 도인과 사상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혁명가 등 많은 이들이 찾았다. 근대한국개벽종교답사단은 그 흔적을 따라 네 번째 답사지 부안으로 향했다. 이번 답사는 5월 28일 최양업 신부 체류지, 원불교 변산성지, 월명암, 반계선생유적지, 계화재 등에서 이뤄졌다.
 

변산 제법성지 일원대도비는 과거 석두암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변산 제법성지 일원대도비는 과거 석두암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근현대 이해의 키워드 ‘바다’
답사단은 군산과 변산을 잇는 새만금 길을 따라 신시도에 있는 최양업 신부 일행 난파 체류지를 찾았다. 이곳은 조선의 두 번째 신부로 활동했던 최양업 신부가 귀국길에 오르다 배가 난파되어 체류한 곳이다.

이곳에서 언급된 키워드는 ‘바다’였다. 바다는 근현대에 들어오기 전까지 국가에 주요 고속도로였다. 육지에서도 강을 도로로 썼을 정도로 바다와 강은 역사와 삶과 문화가 교류되던 곳이다. 가령 군산과 진안의 거리는 100km도 되지 않고, 신시도와 백령도의 거리는 멀다. 

하지만 식생과 문화 등은 군산과 서해안의 섬들이 모두 비슷하다. 답사단은 이를 통해 물길을 자주 이용하는 곳들의 교류가 깊었음을 발견하며 근대사상사의 이해에 바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함을 되새겼다.

이어서 ‘최양업과 최제우’의 관계를 이야기했다. 두 사람은 같은 경주 최씨에, 1850~60년대에 활동한 지역도 충청·전라·경상도로 겹친 시기도 있다. 하지만 천주교로 민중을 돌본 최 신부와 반대로 수운은 『논학문』에서 서학과의 관계를 “운즉일, 도즉동, 이즉비(運則一 道則同 里則非, 타고난 운세는 같다. 주문을 외는 방법도 같다. 교리는 다르다.)”라고 정리하며 주체성을 세웠다. 이 부분에서 답사단은 한 시대를 영위한 두 사람의 방향 선택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거리로 남겼다. 
 

학명과 소태산의 ‘사상적 교류’
최양업 신부 체류지를 벗어난 답사단은 원불교 변산성지에 도달했다. 변산성지는 소태산 대종사가 회상창립의 준비를 한 곳이다. 그리고 당시 반농반선의 선불교를 주창한 학명선사와 깊이 교류를 했다. 원불교의 『대종경』에도 학명선사가 등장하지만, 『학명집』에도 소태산 대종사가 등장한다. 

여기서 학명선사는 소태산 대종사를 ‘석두거사’라고 부르며 깊은 정신세계의 이야기를 나눈 편지를 남겼다. 이런 관계 속에 소태산 대종사는 제자인 정산종사를 학명선사의 상좌로 보내기도 했다. 이에 대해 박맹수 원광대학교 총장은 “두 어른이 변산에서 교류한 5년 동안 학명선사의 개혁불교 사상이 정산종사를 통해 원불교라는 저수지에 흘러오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변산성지에 이어서 찾은 곳은 삼대 명승지 중 하나이자 한국불교의 정신을 길렀던 대표적인 곳 월명암이다. 월명암은 재가불교·생활불교·여성불교로서의 상징을 가지는데, 이런 상징을 갖게 된 것은 부설거사가 창건했기 때문이다. 부설거사는 재가에 결혼까지 한 신분이었지만 그 가족 전체가 성불을 이뤘다. 때문에 재가와 생활, 여성이라는 상징을 가질 수 있었다. 또 월명암은 근현대 수많은 고승을 배출한 ‘산상무쟁처’로 유명한 수도도량이기도 하다.

『대종경』에도 “…부안 변산 쪽을 바라다보매 허공 중천에 맑은 기운이 어리어 있는지라, 그 후 그곳으로 가보았더니 월명암에 수도 대중이 모여들어 선을 시작하였더라…” 고 언급되기도 했다. 답사단은 변산성지와 월명암에서 학명선사와 고승들이 진행했던 ‘안으로부터의 개혁’과 소태산 대종사의 ‘밖으로부터의 새로운 개혁’, 그리고 성지장엄과 성지보존의 방향을 논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실학에서 보는 경제와 사상의 관계
답사단은 다음으로 조선실학의 태두 ‘반계선생 유적지’를 찾았다. 반계 유형원은 조선 실학의 선구자로 부안에서 말년까지 지내며 『반계수록』이라는 저서를 남겨 부민(富民)·부국(富國)을 위해 제도적인 개혁을 주장했다.

이곳에서 답사단은 과거의 지형구조와 생산력, 거기서 파생되는 사상적 발전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박 총장은 “전통시대 사상철학의 발전에는 지배층이 재원을 제공했다. 후천개벽종교는 그들 스스로 재원을 해결해야 했다. 소태산 대종사는 저축조합과 방언 등으로 스스로 해결했다. 그렇다면 오늘의 원불교는 어떻게 해야할까?”라는 질문을 던진 후 “제2의 방언공사를 해야 한다. 백년 전 원불교처럼 활력과 역동성을 갖춘 종교가 되려면 제2의 방언공사, 4차 산업혁명을 꿰뚫어야 한다”고 말했다.
 

‘국맥과 도맥’ 사이 유림의 방향
부안 답사의 마지막 방문지는 계화도에 있는 ‘계화재-간재선생유지’다. 간재 전우는 조선 최후의 거유라고 불리는 유학자이면서도 다른 유림에게 “죽음이 두려워 의병에 못 나가고, 화가 무서워 배척, 배일을 못했다”, “부유(腐儒, 썩은 선비)”라고도 비판받았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비판을 들으면서도 “500년 종사도 중요하지만 3,000년의 도통(道統)을 잇는 것이 더 소중하니 무가치하게 목숨을 버리지 말고, 학문을 일으켜 도(道)로써 나라를 찾아야 한다(『추담별집(秋潭別集)』, 1869)”고 주장했다. 그러던 그는 1908년 (일본이 지배하는) 육지를 떠나 여러 섬을 떠돌다 말년에 부안 계화도에 정착해 최후까지 집필활동과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때 계화도의 원래 이름인 지경 계(界) 자, 불 화(火) 자를 정통 도맥을 잇는다는 뜻으로 이을 계(繼) 자, 꽃 화(華) 자로 고쳐 썼다. 현재 간재선생유지의 사당에도 계화(繼華)를 쓰고 있다. 

수많은 비판에도 ‘국운이 끊기는 것 이상으로 도맥이 끊기는 것이 더 위급하다’며 도맥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간재의 정신은 소태산 대종사의 법맥을 잇고자 하는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2022년 6월 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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