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훈 교무
안훈 교무

[원불교신문=안훈 교무] 돌아오는 원기109년(2024)이면 익산에 원불교 중앙총부가 들어선지 일백년이 된다.

익산총부 일백년 동안 소태산 대종사를 비롯한 많은 창립유공자들이 있지만 김제를 대표하는 인물로 추산 서중안(1881~1930)을 꼽을 수 있다. 서중안은 그의 법호만큼이나 서릿발 같이 짧고 굵직한 삶을 살았다. 김제에서 태어난 서상인(호적명)은 집안 가풍으로 유학을 공부했지만 노비문서를 불살라 신분제 차별제도를 바로잡고자 하는 진취적 기상을 가지고 있었다. 새로운 질서를 향하는 그의 행동은 지역 유림에도 신선한 반향(反響)을 일으켜 서당 훈장으로 초빙되었으며 대한제국 말기 성덕면장으로 추대되어 6년간 면민들을 위해 봉사했다.

그는 30대 중반이 되어 만학으로 한약사 시험에 합격하여 김제 중심지 교동에 인화당 한약방을 개설하고, 당시 해산물 물동량이 풍부하던 강경포구에도 분원을 낼 정도로 사업적 역량을 발휘했다. 풍부한 식견과 재력(財力)으로 전라북도 한약사협회장을 역임하는 등 인생에서 절정의 생애도 누렸다.

그의 나이 42세로 접어드는 원기8년(1923) 6월 초순, 친형 서상진의 인도로 부안 변산 봉래정사를 찾아 소태산을 만난 이후 10살이나 연하인 32세 청년에게 부자지간의 결의를 맺자고 졸랐으며, 사주부님의 웅대한 포부와 호대한 법을 장소가 넓고 교통이 편리한 곳으로 옮겨 천하 사람들의 앞길을 열어 줄 것을 간청하였다.

소태산 대종사는 하산할 때가 된 것을 짐작해 허락하고 회상 공개에 따른 제반 실무를 그에게 책임지게 했다. 원기9년(1924) 불법연구회 창립총회에서 초대회장에 피선(被選) 된 서중안은 8월 익산군 북일면 신용리 344-2번지 땅 3,495평 총부기지 대금 전부와 건축비 일부를 희사했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20억원에 달하는 큰 금액이다.

추산은 불법연구회 궁핍한 재정을 위해 그의 사업장인 인화당 한약방에 일산 이재철과 도산 이동안을 불러 한의원 살림과 약재상 운영을 맡겨 훗날 보화당이 태동하는 기연을 심었고, 익산 총부 건설의 감역을 위해 자전거로 매일 김제와 익산을 내왕하는 성의를 보였다.

김제약방에서 불이 났다는 전보를 받고도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심법으로 일관했으나, 불법연구회라는 사교에 심취되어 가사(家事)를 돌보지 않는다는 일가친척의 오해와 양자로 들인 조카가 소유권 분쟁을 일으켜 법적문제로 심화되면서 마음병을 얻었고, 이후 병이 깊어져 원기15년(1930)에 열반했다. 소태산은 이때 금강산 유람 7일째 되는 날 아침 세수를 마치고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이동진화에게 “오늘 다정하고 인연깊은 사람이 가는 구려!” 하면서 애석함을 표현했다. 

김제지구에서는 추산 서중안의 소태산 대종사와 교단을 향한 뜨거운 신심 공심을 기리고자 익산 총부 100년을 맞아 추산 서중안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인화당 한약방이 있던 교동 터에 추산기념비와 한약방 머릿돌을 세워 김제지구 원불교 문화유산으로 보존하고 추산의 숭고한 뜻을 후학들에게 전승(傳承)하고자 한다. 

/김제교당

[2022년 6월 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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