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산 정성덕 원로교무
소산 정성덕 원로교무

[원불교신문=이현천 기자]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한 수재였다. 전후 혼란스러운 시국에 피난 삼아 고향(영광 군서)을 떠나다가 원불교를 만났다. 그리고 사정이 어려워 배움을 얻지 못하는 아이들이 눈에 밟혀 20여 년을 아이들을 위해 헌신했다. 전무출신의 길도 아이들과 어른의 말씀을 받들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만난 이 회상에 일평생 감사할 뿐이다.

소산 정성덕 원로교무(昭山 鄭性德·93)를 만났다. 푸근한 기운과 인자한 미소를 담은 그는 50여 년의 교역생활 중 감찰원 과장, 반백년기념사업회 사무차장, 교정원 재무부장, 서울회관 관장, 중앙수양원 원장 등 다양한 직책을 맡았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모든 약력에는 중학교 과정 야간학교 ‘원광고등공민학교 교감·교장 겸직(이하 공민학교)’이 붙어 눈길을 끈다.
 

‘무아봉공’의 정신으로 47년간
한 가지 직책도 하기 어려운데 늘 공민학교를 겸직한 것을 정 원로교무는 덤덤히 회고했다. “사실 감찰원에 갈 때 도저히 겸직을 못 할 것 같아 정산종사께 찾아가 사직의 뜻을 밝히기도 했어요. 그런데 정산종사께서 ‘감찰원을 그만두더라도 공민학교에 있거라. 거기는 인재가 많이 나온다’고 하셔서 두 마음 없이 근무했죠” ‘내가 아니면 저 아이들을 누가 가르치겠냐’ 마음먹고,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 말씀을 새기면서 살아온 지난 시간이었다.

학교가 운영된 28년 중 23년을 근무한 정 원로교무. 그동안 그는 급여도 없이 오직 아이들을 위하는 마음으로 헌신했다. 이런 그의 노력을 사회에서도 알아줘 이리시장으로부터 감사장, 문교부장관의 표창장, 『대한민국 공훈사 제4집 현대인물사』 등재 등으로 그의 공도 정신을 기렸다.

또 퇴임을 앞두고는 중앙수양원으로 발령이 났다. 정 원로교무는 ‘사회복지사 자격이 없는 사람은 기관 인사를 낼 수 없다’는 정부의 방침을 따르기 위해 노년의 몸에 자격증 취득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했다.

그는 “사은의 은덕으로 합격해 부임할 수 있었지요. 피난 삼아 온 나를 이렇게 써주시니 교단에서 하라 하면 걱정도 없고, 오직 감사한 마음으로 살았어요”라며 구순이 넘은 나이에도 확고한 전무출신 정신을 보여줬다.
 

피난 삼아 온 익산, 소태산 대종사 문하 찾아와 다행
‘인재가 많이 난다’ 한 말씀에 무급 23년 근무
“교단서 하라 하면 걱정 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어른 말씀 받들어 내딛은 전무출신의 길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근무하다가 한국전쟁이 터졌다. 이후 산속에서 피난하다가 늦게 하산하는 바람에 오해를 받아 지서에서는 신원증명서 발급을 해주지 않았다. 신원이 증명되지 않으니 단기 직장생활만 하다가 결국 무위도식하는 사람이 됐다. 

어느 날 ‘이렇게 바둑이나 두고 살지 말고, 어디 강원도 산골짜기 가서 중노릇이나 하자’는 생각에 고향을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러다 한 고향 선배가 이리(현 익산)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다는 말에 ‘나도 대학을 가야겠다’ 하고 이리에 왔다. 유일학림(원광대학교 국문학과)을 다니며 초등교사로 근무한 경력을 살려 원광고등공민학교의 교사로 봉사했다. 이것이 23년 헌신의 시작이 됐다. 그러다 법산 이백철 종사(당시 보화원 총무)의 “보화원 훈육을 맡아달라” 는 말에 공민학교 교사와 보화원 훈육(교육담당)을 맡으며 원불교에 정식 입교했다.

그러던 중 법산 이백철 종사가 총무 후임을 구하지 못한채 용신교당으로 이동하게 됐다. 이에 공산 송혜환 대봉도(당시 보화원장)가 그에게 총무직을 맡겼다.

정 원로교무는 처음에는 거절했다. “나는 전무출신도 아니고, 대학을 다녀야 했어요. 그런데 공산님이 상산종사님(박장식·당시 교정원장)께 보고를 했더라고요. 결국, 상산종사께서 ‘총무를 수락하라’고 하셔서 전무출신 서원서도 안 내고 총무를 맡았죠.”

이후 보화원 총무에 이어 공민학교 교감까지 맡게 되면서 전무출신 서원서를 냈다. 당시를 회고하면 이렇다. “서원서를 내려는데 부탁할 인연이 없었어요. 그런데 주변에서 제가 영광 출신이라고, (같은 영광 출신) 고산 이운권 종사님께 가서 받으라고 하더라고요. 고산님이 어떤 어른인데, (감히) 같은 동네 출신이라고 그렇게 추천을 부탁드렸었죠(웃음).” 이후 정 원로교무는 교육자이자 원불교 교역자로서 한치의 사(私)없는 일생을 살았다.
 

일생 헌신의 뿌리, 부모님
이런 희생과 봉사 정신은 어디서부터 발현됐을까. 정 원로교무는 영광 군서의 8남매 부잣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근동의 존경받던 어른이었고, 어려운 이를 그냥 두고 보지 못했다. 근방에 배고픈 이들을 먹이고, 스스로는 소찬을 먹고 대신 고생하는 일꾼들 밥상에는 늘 고기반찬을 올려줬다. 

“우리 집 마당이 넓어서 (공출)나락을 모아두는 공간으로 썼어요. 그런데 거기서 나락이 없어진 거예요. 그때 아버지가 ‘이거 이야기하면 동네도 지서도 난리가 난다. 우리 나락을 거기 채우자’하고 덮으시더라고요. 나중에 해방되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락을 훔쳐 간 양반이 나서서 상여 깃발을 다 하고 그랬어요. 어떻게 배우지도 않고 그런 삶을 사셨는지 대단하죠.”

정 원로교무의 희생·봉사 정신은 일평생 몸과 마음으로 모범을 보였던 부모님으로부터 비롯됐다.
 

‘오죽하면 저랬겠냐. 절대 섭섭한 소리 하지 마라’
인터뷰 내내 정 원로교무는 “오직 감사하라”는 말을 강조했다. “우리가 어찌 다행히 소태산 대종사님 문하에 들었는가 생각해보세요. 전부 마음속에 달렸어요”라고도 당부했다. “모든 일에 ‘오죽하면 저랬겠냐’고 한 번 더 생각하면 상대의 세정을 이해할 수 있어요. 그리고 절대 어디서든 나쁜 이야기, 아쉽고 섭섭한 소리는 하지 마세요. 그런 마음으로 살면 돼요.”

[2022년 6월 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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