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교반백년기념 산실… 신영기 사가 희사
일식주택 영향 받은 개량한옥

구정원 전경. 현재 교단혁신특별위원회와 수도원사무처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다.
구정원 전경. 현재 교단혁신특별위원회와 수도원사무처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다.

[원불교신문=유원경 기자] 구정원은 일식 주택의 영향을 받은 개량한옥이다. 일식 목구조가 주된 구조이며 부분적으로 전통적 기법을 수용했다. 외관은 유리창호와 시멘트 기와, 처마 끝에 함석 차양을 한 근대주택이다. 

장방향의 건물에 현관이 돌출된 평면을 구성하고 있는 구정원. 현관에 들어서면 넓지 않은 마루가 있으며, 마루를 중심으로 정면과 좌·우측에 3개의 사무실로 나뉘어져 있다. 맨 왼쪽 사무실은 외짝 여닫이문을 통해 출입하게 돼 있으며, 정면과 우측에 창문이 설치돼 있다. 좌측으로는 옆 사무실과 연결되는 문이 기둥을 사이에 두고 네 짝 미닫이문과 두 짝 미닫이문이 설치돼 있다. 

가운데 사무실은 마루 정면을 통해 두 짝 미닫이문이 설치돼 주문으로 쓰이며, 좌·우측 사무실로 통하는 미닫이문들이 있다. 배면에는 창문이 설치돼 있는데, 기둥을 중심으로 네 짝 미닫이창이 좌·우측으로 설치돼 있다. 좌측은 홑창이며, 우측창은 겹창이다. 맨 우측 사무실은 외짝 여닫이문을 통해 출입하며, 배면에 두 짝 미닫이창을 설치했다. 

구정원은 소태산 대종사와 은자녀(恩子女) 결의를 맺은 신영기의 사가였다. 신영기는 원기20년(1935) 3월경 총부 구내에 약 1,500원의 비용으로 안채 네 칸 겹집목조와가 80.46㎡와 별채 두 칸을 건축해 생활했다.
 

신영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외가는 오창건 선진의 집안이며, 모친 오철수 선진의 연원으로 원기17년(1932)에 입교해 총부 구내에서 사택 생활을 했다. 신영기의 모친인 오철수 선진은 원기26년(1941) 전무출신으로 출가했고, 신영기는 소태산 대종사를 수행하여 각지를 순회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신영기는 사업을 위해 원기21년(1936) 이리 시내로 이사 하면서 자택을 교중에 희사했다. 교단에서는 이를 총부 사무실로 사용하게 되면서 교정원이 된다. 구정원이라는 이름도 ‘옛날 교정원’이라는 뜻의 이름이다. 구정원은 원래 4칸의 집이었는데, 교정원에서 사용하면서 정면에 현관을 증축했다. 공사 이후 영춘원에 있던 사무실을 구정원으로 옮기면서 원기49년(1964)까지 교정원 사무실로 사용하게 됐다. 

이후 원기49년(1964) 4월 제1회 정기교정위원회에서 총부 사무실을 신축 식당으로 이관하기로 결의, 8월 1일 이관하고 남자숙소로 사용하다가, 원기55년(1970) 2월부터 개교반백년기념사업회사무실로 사용했다. 이후 교무들의 숙소로도 사용했다가 현재는 교단혁신특별위원회와 수도원사무처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별채는 총부 도서실로 사용했었다. 불법연구회 최초의 도서관으로 서대원 선진이 주로 불교서적을, 박광전 선진이 동경 유학 중에 구입했던 서적, 황정신행 선진이 경성에서 보내온 책들이 소장됐었다. 이후 도서실 공간으로는 협소해 서류창고 등으로 사용하다가 원기72년(1987) 철거하고 화장실을 지었다.

[2022년 6월 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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